이해라는 중력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항상 같은 질문을 한다. "국어는 왜 배울까?"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빅뱅 이전의 암흑을 본다. 처음엔 혼돈이다. 시험, 취업, 돈이라는 물질들이 중력 없이 떠다닌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물리법칙이 작동한다. 그 작은 우주들 안에서 무언가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교실에서 나는 때로 우주론자가 된다.
나는 인간 존재의 기본 방정식을 칠판에 적는다. 행복 = 편안함. 편안함의 반경이 넓을수록 행복의 질량이 증가한다. 그리고 그 반경을 결정하는 것은 '이해'라는 이름의 중력이다. 이해의 힘이 강할수록 더 많은 것들을 자신의 궤도 안에 품을 수 있다. 타인의 마음, 세상의 이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민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력이 약한 행성의 운명이다. 작은 충격에도 궤도를 이탈하고, 우주의 먼지가 되어 표류한다. 현대인의 신경증적 증상들—불안, 분노, 우울—은 모두 '이해 중력'의 약화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타인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세상이 왜 이런 모양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 가장 불안하다.
-
문학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프리즘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존재의 의식 속으로 양자 터널링하는 경험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절망, 안나 카레니나의 열정, 홀든 콜필드의 방황. 이 모든 감정들이 우리의 정서적 DNA에 각인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고통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독서는 인식의 해상도를 높이는 행위다. 픽셀이 조밀해질수록 이미지가 선명해지듯, 지식이 축적될수록 세상이 또렷해진다. 경제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불평등은 그저 운명이지만, 자본의 논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바꿀 수 있는 구조다. 뇌과학을 아는 사람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전전두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지식은 우리를 감정의 노예에서 의식의 주인으로 해방시킨다.
화법과 작문은 감정의 건축학을 익히는 일이다. 소통은 의식과 의식을 잇는 다리 건설 공사다. 언어라는 조야한 재료로 정교한 구조물을 만들어야 한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구축하기도, 파괴하기도 한다. 어떤 단어를 어느 자리에 놓아야 상대의 마음에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는지 배우는 것.
-
하지만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는 그 찰나다. 마치 은하수가 처음 보이는 순간처럼, 그들의 동공이 확장되고 새로운 우주가 펼쳐진다. "아, 그래서 국어를 공부하는구나." 이 깨달음이 터지는 순간, 교실은 작은 빅뱅의 현장이 된다.
세상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진짜 위기는 인문학 자체가 아니라 인문학의 언어가 세상과 접촉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상아탑의 언어로는 거리의 마음을 좁힐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을 요리책처럼, 시를 연애편지처럼, 역사를 모험소설처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
결국 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인간의 중력을 키우는 일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더 깊이 공감하며, 더 정확히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시키는 것. 그래서 혼자서도 외롭지 않고, 함께해도 답답하지 않은 사람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치로운 선물이 아닐까.
강의실을 나서며 생각한다. 오늘도 몇 개의 작은 우주가 탄생했다고. 그리고 그 우주들이 언젠가 서로 중력으로 연결되어 더 큰 은하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그 은하의 이름은 아마도 '이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