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키스', 비엔나에 오고 싶었던 이유
어린 아이를 데리고 추운 계절에 유럽을 하는 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루의 해도 짧을 뿐더러 날이 너무 춥고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유모차를 끌고 어딘가를 구경하러 가는 것도 대단한 의지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역사적인 장소인 궁전, 박물관 등 유명한 곳일수록 줄도 길기 때문에 더 망설여지고 결국은 '다음 기회에’를 외치고 만다. 작년 겨울 아이와 함께 파리에 갔을 때도 이래저래 아쉬운 점이 좀 있었다. 그래서 이번 비엔나 여행에서는 딱 하루, 우리를 억지로라도 끌고 다니면서 도시를 안내해 줄 전문 가이드를 찾아보기로 했다.
평소라면 아이를 데리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일은 없겠지만, 오늘은 어쨌든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날이니 다들 마음 바삐 서둘렀다. 계획에 따르면 우린 오늘 하루 동안 비엔나 시청사, 쉘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전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난 그 중에서도 특히 클림트의 '키스' 작품이 걸려 있는 벨베데레 궁전이 제일 가보고 싶었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이 작품도 단 한 번도 이 궁전을 떠난 적이 없는, 이 곳에 와야지만 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그 유명한 쉔부른 궁전.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 궁전이었던 이 곳은 마치 꽃으로 자수를 놓은 듯한 넓은 야외 정원으로도 유명한데, 아쉽게도 지금은 한겨울이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이 세상의 진귀한 것들은 다 모아서 인테리어를 한 방들도 멋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마리 앙뜨와네트의 초상화였다. 16명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끝에서 두 번째, 특출나게 이뻤던 아이. 그 눈망울이 똘망똘망했던 꼬마 아이는 분명 웃음은 짓고 있었지만, 자기 인생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조금은 아는 것도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아쉽게도 이 궁전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이 눈으로만 그 모습을 담아왔다.
하루 출발은 순조롭게 잘했는데 쉔부른 궁전이 아이에겐 좀 지루했나 보다. 가이드분이 작은 목소리로 송수신기를 통해 설명을 해주셨는데 이어폰이 없는 아이는 멀뚱멀뚱 사람들을 지켜보다 곧 지쳤는지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그래서 약속 하나를 했는데, 이 궁전을 잘 돌아보고 나면 나중에 오스트리아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전통 인형이나 장난감 하나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궁전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기프트샵을 들렀는데, 하필 거기 온갖 공주님 의상들이 걸려있었다. 아이는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보라색 드레스를 하나 골라 신나게 봉투를 흔들며 궁전을 나왔다.
다음으로 간 곳은 내가 오늘 가장 가고 싶었던 벨베데레 궁전. 바로 클림트의 작품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워낙 인기가 많아 다른 도시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키스'는 절대 이 궁전을 떠나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 벨베데레 궁전을 찾는 것인데, 만약 이 작품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면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클림트 '키스' 작품 앞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었다. 책이나 사진에서 봤을 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볼 수록 반짝반짝 황금빛 물감으로 수놓은 의상이 화려하게 빛났고, 그림 속 연인들은(실제 클림트와 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 그 옷 속에 폭 파 묻힌 것 같은 원근감이 보였다. 그림 속의 여인 에밀리 플뢰게는 클림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인이자, 아내이면서, 좋은 집안 출신의 의상 디자이너, 한 마디로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이었다. 클림트와 잠시 이별을 했을 때 클림트는 에밀리가 지어준 옷을 입은 자신과 자신의 연인을 그린 저 작품을 완성했고, 결국 저 작품을 통해 다시 떠났던 에밀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연인들이 서 있는 꽃밭 뒤가 절벽인 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인연이 끝나게 되더라도 오늘 우리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는 의미였다. 연인들의 뒤에 있는 배경 안의 작은 금빛 터치들이 실제로 보니 반짝반짝 쏟아지는 별들 같았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 도시에 온 이유를 충분히 채웠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겨울이라 더 많은 비엔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했어도 말이다. 아이는 알까? 오늘 이 곳에 와서 봤던 작품이 그 유명한 클림트의 것이란 것을? 당연히 모르겠지만, 구태여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을 때 이 벨베데레 궁전에 함께 와서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