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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Dec 31. 2018

비엔나에서 데이트를

윤서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사랑하는 엄마 딸 윤서에게,


이번에 유럽에 와서 틈만 나면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엄마에게 윤서는 계속 "엄마 뭐해?"라고 묻고 있단다. 엄마는 지금 윤서랑 아빠와 하고 있는 2018년의 유럽 여행에 대해 부지런히 기록을 남기고 있는 중이란다. 이제는 엄마와 제법 말이 통하는 윤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원하는 답이 있을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재밌는 버릇이 생겼는데, 사실 아까 그 질문에 엄마는 뭐라고 대답을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서 "엄마는 일을 해. 글을 쓰고 있어"라고 대답을 했어. 사실, 이건 일이라기보다, 나중에 윤서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20대가 되었을 때, 혹은 엄마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그리고 더 나중에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이 글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쓰기로 한 거야. 서른일곱 살 엄마와 세 살 윤서의 기록. 그래서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글을 쓸거야.


오늘은 엄마, 아빠가 할머니에게 윤서를 잠시 맡기고 둘이서만 밖으로 나가 비엔나에 와서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단다. 데이트라고 해서 별 건 아니고, 아빠가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식당과 비엔나에서 오래된 멋진 카페를 검색(윤서는 세 살인데 벌써 이 '검색'이란 단어를 안단다. 정말 신기해!)해서 둘이 나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어. 그런데 정말 너무 멋진 코스라서 엄마는 나중에 윤서가 사랑하는 사람과 비엔나에 왔을 때 엄마, 아빠가 데이트를 했던 그 코스 그대로 해봤으면 좋겠어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거야.



우선, 우리는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되고 맛있는 슈니첼(한국의 얇은 남산 돈가스와 비슷하게 생긴 독일 음식)을 판다는 Figlmuller란 식당에 갔단다. 아빠는 고기를 정말 좋아하는데(특히 돼지고기), 윤서도 아빠를 닮아 고기를 좋아하니 분명 이 곳을 좋아할 거야. (아빠는 요즘 윤서를 육식 공룡이라고 부른단다. 넌 지금 좀 마른 편인데 야채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고기를 입어 넣어주면 어른 1인분을 다 먹을 때도 있지!) 엄마는 치킨으로 만든 슈니첼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빠가 그런 메뉴를 시키는 사람은 없다고 고집을 부려서 돼지고기 슈니첼 1인분, veal 슈니첼 1인분, 그리고 샐러드 하나를 시켜서 나눠 먹었단다. 그런데 정말 아빠 말이 맞았어! 아빠가 시킨 veal 슈니첼이 제일 맛있어서 엄마랑 아빠랑 메뉴를 바꿔 먹었단다. 엄마는 항상 엄마가 시킨 메뉴가 실패한 것 같으면 조용히 아빠와 접시를 바꾸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고맙게도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엄마가 시킨 메뉴를 싹싹 비워준단다.




피그뮐러란 슈니첼 집은 1905년에 문을 열었대. 그러니까 100년도 더 된 집인데, 매일 밤 식당 앞에 줄을 길게 선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거든. 그러니까 윤서가 어른이 돼서 사랑하는 연인과 이 곳에 오게 될 2,30년 뒤에도 이 집은 분명 이렇게 장사를 잘하고 있을 거야.


슈니첼을 맛있게 먹었다면 밖으로 나와 운치 있는 돌길을 잠깐 걸으면 아빠가 발견한 멋진 카페가 나온단다. Cafe Diglas라는 곳인데 무려 1875년에 문을 연 곳이란다. 아빠는 엄마가 글을 쓰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항상 여행을 다닐 때면 엄마가 글에 활용할 수 있도록 소위 '블로그용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빠의 사진 구도 실력은 몇 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라 실제로 쓸 수 있는 사진은 거의 없단다) 오늘도 아빠는 엄마를 위해 이 1875년이란 숫자가 담긴 간판을 열심히 찍어줬어.



이 카페의 진수를 느끼려면 저녁을 먹은 후 밤에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러 가야 돼. 멋진 피아니스트 할아버지가 나와서 연주를 하시거든. 어려운 곡은 아니고 우리가 익히 알고 흥얼거릴 수 있는 곡들을 재즈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를 하시는데 엄마는 오늘따라 그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지. 거의 여든 살이 다 되신 할아버지 피아니스트가 깔끔하게 차려입은 슈트를 입고 아이패드(이거 혹시 박물관에서 본 적 있니? 애플사에서 나온 혁신적인 태블릿 PC!)에 담긴 악보를 보며 연주를 하시는데, 나이가 아주 많아도 직업이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라는 걸 느꼈단다. 커피를 마시면서 엄마가 아빠에게 "언제까지 일하고 싶어?"라고 물으며 뭔가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했는데 "은퇴 자금을 모은 후에 최대한 빨리!" 이렇게 말했단다. 이 글을 윤서가 읽을 때쯤이면 아빠가 정말로 아빠 소망대로 은퇴를 하고 여행 다니고 있을지, 아니면 계속 일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빠가 나이가 들어서까지 쉬엄쉬엄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나갔으면 좋겠단다. 아, 물론 지금처럼 집을 항상 비워야 되는 너무 바쁜 컨설팅 일은 빼고 말이야!


저녁이 되면 아주 나이 많은 할아버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해주신단다. 이 분은 젊었을 때 어디에서 연주를 했을까?



와, 이렇게 윤서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니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써지네. 엄마가 요즘 고민이 글을 계속 쓰고 싶은데 잘 안 써지기도 하고, 또 쓴 글이 좀 지루해서 마음에 안 들기도 했거든. 앞으로도 이렇게 윤서에게 종종 편지를 남겨야겠다. 우린 내일 또 아침 일찍 윤서가 손꼽아 기대하던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를 하러 잘츠부르크에 가야 되니까, 엄마도 이제 윤서 따라서 꿈나라로! 내일 아침에 만나자, 엄마의 귀염둥이.



사랑하는 엄마가.

2018.12.28






아이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 잘츠부르크 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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