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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Oct 19. 2023

주거의 품위

불쌍한 서울살이


내 친구는 똑똑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좋아하더니 딱지 모으듯 석사를 한 개 따고, 전공을 바꾸어 하나   따더니,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아 종국엔 '똑똑' 박사님이 되었다. 우리 친구들은 똑똑한 애에게,      


“네가 우리 중 제일 똑똑하니 반드시 성공해서 우리를 위한 5층 집을 지어다오.”


라고 했다. 누가 어느 층을 쓸 것인지 상세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무쪼록 함께 모여 살자고 했다. 똑똑한 애는 덜 똑똑한 우리에게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똑똑한 애는 착하기까지 했다.      



지방에 살면서 이 친구를 자주 못 만났다.

서울에 이사 온 후 우리 집에 처음 놀러 온 똑똑한 애가 말했다.     


“뭐야! 집 네!”     



귀를 의심했다. 나는 똑똑한 친구에게 그동안 전화로 투정을 했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베란다가 없다느니, 창이 작다느니, 공간 활용이 별로여서 불편하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그러면 똑똑한데 착하기까지 한 애는 그래, 어쩌냐, 속상하겠다, 등의 추임을 넣어주며 나를 측은히 여겨주었다. 그랬던 그녀가 실제로 우리 집에 와서 여기저기 다 둘러보고서 짓는 표정이 마치 식스 센스급 반전영화를 본 사람 같았다.     



똑똑한 애와 나는 거의 30년을 알고 지낸 사이다. 좀 더 섬세하게 표현하자면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가졌는가?’,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시구를 처음 마주했던 날에, 그녀를 가장 먼저 떠올렸을 만큼 친밀한 벗이다. 함께 진하게 사귄 세월이 있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가 상당 부분 포개어지는 그녀와 나인데, 우리 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의아했던 찰나에 불현듯 떠올랐다. 왜? 나는 이 집에 불만이 있는데, 그녀는 좋다고 하는 것인지.      



대번에 짐작이 갔다. 우리는 비슷한 동네와 환경에서 자랐는데, 나는 먼저 결혼하고 지방의 한적한 도시에 정착해 10여 년을 살았다. 반면 그녀는 주로 서울에서 지낸 데다 신혼집도 이 대도시 한복판에 얻어 아이까지 키우고 있었으니. 그것이 우리 시각의 커다란 차이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무리 절친해도 그녀의 집값을 물어보진 않았다. 다만, 서울을 벗어나 살았던 우리 집보다 비싸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지방에서 살았던 마지막 집은 오래된 30평대의 아파트였다. 그 집의 특장점이라면 거실이 넓고 베란다가 그에 비례하게 여유 있다는 점이었다. 설계하신 분의 의도가 베란다에다 정글을 만들라는 거였을까? 공간을 다 합치면 고시원에서 제일 비싼 방의 하나가 나올법했다. 아이들은 코로나 때 어디 나가지 못하는 동안 거실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탔고, 공놀이를 했다. 층간 소음 걱정마저 없었던 것은, 일부러 1층에 집을 구한 데다 2층엔 남자 쌍둥이가 살고 있어서였다. 여러모로 마음 편하게 지냈다. 창밖으로는 캠핑해도 될 만큼의 여유로운 잔디가 펼쳐져 있었고, 오래된 나무들의 잎이 무성해 그늘이 널렸다. 지하 주차장이 없어 외부에 자동차가 빼곡하게 있어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배경에 녹색이 가득한 덕이었다. 먼 곳으로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지 않아도 아파트 안에서도 꽤나 만족스러운 4계절을 누릴 수 있었다. 벚꽃, 목련, 개나리, 은행나무, 계수나무, 단풍나무의 색색깔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똑똑한 애도 이사를 했는데, 나에게 집이 좁다고 노래를 했다. 아이 짐 때문에 비좁은 느낌이 드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진심으로 좁았다. 지하철 가깝고 젊은이들이 많은 핫플레이스에 위치한 집은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에서 햇빛을 어떻게든 많이 들게 하려 넓게 지은 창으로 바람이 숭숭 들었다. 장난감을 제일 좋아할 나이의 아이 짐만으로도 거실은 만석이었다. 하나는 아쉽지만, 동생을 낳아 키우자니 고민이라는 말이 절절히 이해되었고 아무래도 그럴 계획이라면 이사를 해야 할 법한 공간이었다. 쉬는 토요일에 집에서 아이와 놀고 있으면 종종 인터폰이 울려, 주말에도 마치 출근하듯 일찍 일어나 아이를 데리고 근처 도서관을 가거나 외곽에 있는 할머니네 집에 간다고 했다.


절친했던 우리가 10여 년을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살았으니 하나의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를 수밖에.          



똑똑한 애가 다녀가고 나서 꿈 많은 애가 놀러 왔다. 꿈이 많은 친구는 물 건너 뉴욕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한 친구다. 나와 똑같이 음악 전공을 해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악기 연습에 매진했지만 새로운 꿈을 좇아 이전의 이력을 버리고 용감하게 다른 분야의 예술을 하겠다고 달려든 친구다. 문화예술이 풍부한 이 도시에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펼쳐보려 애쓰는 친구는 서울을 벗어나 살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도 집이 좁은 것은 삶의 에러 사항이라, 아이를 키우며 이리저리 공간 활용하는 데 예술적 창의력을 쓰고 있다. 꿈 많은 애도 딸아이와 함께 놀러 와서는 우리 집이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꿈이 많은 친구도, 똑똑한 친구도 모두 아이는 하나다.          



서울 사람의 시선을 가지고 돌아보니 내가 집에 대해 트집 잡았던 게 철없고 사치스러운 투정이었나 갸우뚱거리게 됐다. 하지만 내가 가졌던 보금자리에 대한 첫 마음은 서울과 지방 사람의 유의미한 차이에서 났음이 분명하다. (독자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일러두지만, 우리 집은 아파트도 아니고, 빌라도 아니다. 30평 정도의 신축 다세대 건물임을 밝힌다.)   

  


지방에 살던 조카가 유명 재수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방을 구하러 갔을 때의 충격받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간신히 제 몸 하나 눕힐 침대와 간이 책상 정도가 전부인 고시원 방에서 언젠가 봤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단다. 보다가 눈물을 흘렸던 쪽방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저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했는데, 자기도 서울에서 생활하려니 똑같은 처지의 불우이웃이 되었다나.      



반대의 경험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서울 이외의 지역을 모두 시골이라고 생각하는 무식이였는데, 지방에 있는 친척 집에 놀러 갔다가 입이 떡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대리석이 깔린 대궐 같은 아파트에 8인용 소파가 있었다. 집의 크기가 행복의 조건은 아니지만, 어린 마음에 지방은 무조건 열악할 것이고, 서울에 사는 삶보다 덜 행복할 것이란 편견이 와장창 깨진 것이다, 그 가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함 없이 느긋하고 화목해 보였다.           



지방에서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다면, 지방에서 쾌적하고 질 높은 삶을 살 가능성에 대해 모를 확률이 높다. 나도 처음 지방에 갈 때, 어쩔 수 없이 갔고 억지로 적응해 뒤늦게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서울 촌놈’들의 등골을 빼먹는 콧대 높은 집값 때문에 주거의 질이나 주거의 품위는 논하기 어렵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하여 버티며 내 살 곳 하나 마련하는데 전심전력해야 한다. 똑똑하고 착해도, 용감하고 꿈을 좇아도 이 서울에서는 가차 없다. 그것을 일찍부터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결론을 냈나 보다. 부지런히 똑똑해지는 것보다, 바르게 착한 것보다, 열정적으로 꿈을 꾸는 것보다, 건물주가 돼야겠다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방구뽕과 어린이들


안 되겠다, 들아.

우리, 서울 밖으로 나들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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