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금세 친해지는 것이 어린이의 세계가 아닌가보다. 서울에 이사 온 후로 아이가 적응을 힘들어했다.
아이 입에서 나온 말들은
“애들이 치사해.”
“애들이 안 끼워줘.”
“놀 친구가 없어."
였다.
지방에 살 적엔 친구 문제로 어려운 적이 없었는데, 전학 오고 나서 첫 학기에만 선생님께 2번이나 따로 연락을 받았다. 친구와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사회에도 텃세가 있고, 강자가 있기 마련이라, 새로 굴러온 내 아이가 감당하고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려니 했다. 다양한 친구들을 탐색해 보고 잘 맞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일렀다. 그런데, 친구를 사귀려 해도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노는 친구가 별로 없단다.
이전 학교에서는 학교가 끝나면 남자아이들끼리 축구를 하고 술래잡기를 하고 축구를 하고 떡볶이를 먹고 축구를 했다. 물론, 너도나도 학원 안 다니는 친구는 없었지만 놀이터가 베이스캠프였다. 친구들은 바통터치를 하고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다가 저녁 먹으러 이제는 그만 들어오라는 목청 높은 어머니들의 외침을 듣고서야 집에 들어왔다. 마음 한편에 저렇게 계속 놀려도 되나, 살짝 걱정되었어도 돌이켜 보면 나도 저 나이 때 노는 게 너무 재밌었다. 잘 놀아본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믿으며 내버려 두었다.
사실, 내가 말하는 여유롭고 친밀한 분위기가 모든 지방에 해당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어디든 노란 버스를 타고 어디로 실려 가는 아이들이 많다. 전라남도 땅끝 어느 지방에도 새로 들어선 아파트에 임장 하러 다니는 업자들이 그 동네의 뜨거운 교육 환경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말이다. 서울이어도 동네에 따라, 형편에 따라 매우 다르다. 상식을 벗어난 선행교육의 과열 지역만큼이나 해로운 건 방치된 환경이다.
전학생 아들을 위해 세세히 신경 써주신 선생님의 연락을 받은 후 하교하는 아들을 데리러 갔다. 아이들의 싸움은 학교 끝나고 주로 일어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성향상 승부욕이 강하고 거친 편에 속하는데, 선생님의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 게임을 하다 보면 이기고 싶은 마음이 과열되어 욕설도 흔하게 들리고, 사고가 발생할 확률도 더 높다고 했다. 분명히 라떼도 다 그렇게 컸을 텐데, 요즘 아이들은 핵가족 안에서 자라는 데다 코로나 몇 년을 겪어서 그런지, 더 갈등을 풀어가는 능력이 부족한 듯 보였다.
학교에 도착하니,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이 중에 남은 몇몇이 있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도 각자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보니 호걸이 될 씨앗을 품은 남아들이었다. 다만,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을 덜 배운 미숙함에 방치된 아이들은 무법천지의 축구를 했다. 넘어져서 다친 사람이 생겨도 일으켜주거나 괜찮은지 들여다보는 애가 없었다. 우리 팀이 골을 넣었는가 못 넣었는가에만 열을 올렸다. 어른의 중재가 꼭 필요해 보였다.
결국, 나는 날마다 그 이른 하교 시간에 맞추어 가서 기다릴 자신이 없어, 믿을만한 피아노 학원을 하나 물색해 현실적인 대안으로 삼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은 피아노를 치러 가는 일상을 좋아했고, 그렇게 봄부터 시작된 한 학기 어치의 부적응을 토대로 가을에는 안정을 찾았다.
서울로 이사 오고서 학교에 처음 참관 수업을 보러 간 날이었다. 교실 곳곳에 걸린 아이들의 피카소 같은 작품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칠판 옆에 붙은 교실 규칙과 표어가 눈에 띄었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맙시다.”
순간 이것이야말로 서울에서 지향하는 삶을 대변한 핵심문장이구나했다.
옆으로도 위로도 아래로도 바글바글하게 붙어사는 서울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제한이 많다. 한정된 경계 안으로 남들이 침범해 들어오면 안 되고, 나 역시 경계선 바깥으로 삐져 나가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선을 잘 지켜야 나도 살고 너도 산다.
만약 지방에 산다면, 혹은 시골처럼 띄엄띄엄 산다면, 충분히 자기 영역이 확보된 상태로 타인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심적·물적 땅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는 수고가 애초에 없어도 되니,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타인을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상태가 기본값이다. 거기에 쏟는 에너지가 이미 줄줄 새고 있으니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누군가는 여유로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을 어떤 사람은 피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지나가다가 담벼락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린 포스터들을 봤다. 아이들이 직접 그린 것으로 다음 주에 운동회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피구, 계주, 등 다양한 종목의 그림을 귀엽게 색칠한 모습이었다. 그림만 보고 무심코 지나갈 뻔했는데, 옆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조그만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학교 운동회에 지역주민들을 초대한다는 내용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10월 22일 10시부터 3시까지 신나는 가을 운동회를 합니다. 조금 시끄러울 수 있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각자 적은 문구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죄송함을 담아 운동회 때 발생할 수 있는 소음을 이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운동회 때문에 민원이 들어온 전력이 있었던 걸까? 주변 상점들에게 하루치의 피해가 많았던 걸까? 그것을 대비해 아이들이 이런 준비를 해야 했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앞 집 순이 할머니도 뒷 집 철이 할아버지도 모두 모여 구경하는 운동회는 '응답하라'에나 나오는 일이 되었나 보다며, 나의 연식을 실감했다.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