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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덕이 Feb 02. 2024

요즘 비수기인
프리랜서는 어떻게 불안을 달래나

나는 요즘 비수기다.

(안녕하세요, 성은 비, 이름은 수기....)


비수기의 프리랜서는 약간 맛이 가있다.

몇 년째 겪는 비수기지만 올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것 또한 비수기다.


나의 주 업무는 강의와 상담이기에 일의 특성과 기관의 사이클에 따라

성수기와 비수기가 정해진다.

몇 년 동안 일하는 기관이 일정하다 보니 비수기가 언제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막상 시작하면 각오했어도 심란해지곤 한다.


군무원 학원에서 강의 공백기는 시험이 끝난 7월~8월이다. 

어떤 학원은 8월부터 바로 강의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통 7월 중순에 시험이 끝나고 9월까지 면접을 진행하기에 등록하는 수강생들이 아직 많지 않다. 


학교의 강의/상담 공백기는 당연히 방학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합치면 1년에 대략 2개월 반 정도는 수업과 상담이 없는 시기다.


AP 심리학 수업의 공백기는 AP 시험이 끝나는 5월부터이다.

대부분의 유학원들은 여름방학 때 특강 수업을 열어 공백기를 최소화하려고 하지만

AP 심리학처럼 벼락치기로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거나

다른 더 주요 과목에 밀리게 되면 사실상 겨울방학까지 공백기라고 볼 수 있다.


대학원 입시 준비 수업의 공백기는 딱히 없지만 이 수업은 성수기 자체도 딱히 없다. 

모집 시기 직전이 가장 바쁘지만 모집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발 빠른 분들은 다음 학기 모집을 미리 준비하기도 한다. 


비수기는 이 모든 일들이 엄청나게 겹쳐서 바빴던 순간이 끝나고 

듬성듬성 일이 있어 덜 바쁜 시기를 말한다.

비수기라고 해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일하는 시간이 급감하고 (그리고 수입도 급감하고)

한창 바쁘게 일하다가 갑자기 일이 끝난 느낌이다.

열심히 100m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슬렁슬렁 달리는 느낌이랄까.

신나서 룰루랄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같이 불안감과 긴장도가 높은 사람은 오히려 이 시기에 맥이 탁 풀린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된다.

생산적이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있어서 에너지만 축나고 있는 상태=전형적인 비수기의 나

바쁠 때는 쉬고 싶다, 쉴 거다를 입에 달고 살다가

정작 쉬라면 쉬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인... 인지라 

많은 비수기들을 쉬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10년 차가 되니 이제 좀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

1월의 비수기를 혼란스럽게 보내고 

이제야 좀 편한 마음으로 비수기를 보내는 중인 10년 차 프리랜서는 요즘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




1. 흥미로운 활동 찾기

요즘 양초 만들기 수업을 처음으로 듣고 있다.

양초 만들기는 몇 년 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실용적인 성격이라 이전에 들었던 수업도 주로 먹어 없앨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 수업을 들었었다.

양초 만들어 봤자 어따 쓰겠나 싶어서

(물론 양초는 태우면 없어지지만 향에 민감한지라 양초 키면 편두통이 자주 생기는 편)

흥미는 있지만 사치스러운(?) 느낌이라 듣지 않았었다.

수업도 대부분 몇 만 원 하는 원데이 클래스 위주라 가격 부담이 있는 것도 한 몫했다.

그러다 이번에 구에서 수강비를 일부 지원해 주는 수업이 열려

집에서 멀지만 이 정도의 조건으로 수업이 열리는 걸 본 적이 없어 고민하다 신청했다.

수입이 줄었는데 양초라니... 이 정도도 금전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사치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첫 수업 후, 그런 마음은 싹 사라졌다.

향 때문에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플까 봐 걱정했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다행히 향이 세지 않았고

손을 사용하며 뭔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잡념과 스트레스로 가득한 마음을 다스리고 

목표에 집중할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양초를 만드는 시간만큼은 굉장히 몰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처음 만드는데도 나름 마음에 드는, 그럴듯한 결과물을 얻은 것이 

한평생 만들기도 못 하고 미술을 못 한다는 신념이 강한 내게 큰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왼쪽이 내가 만든 것, 오른쪽은 같이 수업 듣는 선생님 작품. 어쩌다 보니 둘이 짠 듯이 커플 같은 느낌이라 함께 찍었다.
무려 첫 시간에 만든 캔들. 왁스 태블릿에서 네 잎 클로버는 많이들 하지만 밑에 하트 줄은 처음 본다는 선생님의 말에 뿌듯.

1월에 가장 큰 활력을 가져다준 활동은

바로 이 양초 만들기 수업이었다.

다음 주에 만들 양초 모티브는 뭘로 해볼까, 어떻게 색을 조합해 볼까 등 

미리 수업을 준비하고 찾아보고 나름의 구상을 했다.

이전에도 이런저런 요리 수업을 들었었지만

수업 때 필기 한 번 한 적이 없었는데

이 수업은 미리 다음 수업을 예습해가고 있었다.

전공과도 전혀 관련 없고 중학교 때 나름 심혈을 기울여 그린 자화상에 D를 받고 난 이후로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했는데

이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유를 느낀 수업이었다. 


우울감, 불안, 권태로움에는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이 성취감이 쌓여 힘을 얻어야 그다음 활동도 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수업과 상담에서는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는 자비롭지 못했다.

손으로 물질을 만지며 현재에 집중하고 아름다운 색과 향에 둘러싸여 심미안을 강화시키는 것.

그게 나의 강점과 흥미를 사용하여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선생님과 수업이 마음에 들어 

언젠가 전문가 과정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길은 정해져 있지 않고

심리학만 하다 보니 그게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언제든지 심리학과 상담을 다른 영역과 접목시킬 수 있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새로운 가능성이 항상 존재함을 느끼니 

통제할 수 없는 미래라고 생각하여 불안했던 마음에 결국 주체는 나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2. 마인드셋 바꾸기

거창하게 마인드셋 바꾸기라고 적었지만

사실 마인드셋은 한 번에 바꿀 수 없다.

한 사람이 지금까지 경험한 인생은

그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는, 

지식의 틀인 스키마를 만들어준다.

개인의 비합리적인 행동이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아 바꿨으면 해도

그리 쉬이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최선이자 때로는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나의 비합리적 사고 중 하나는 

'나는 유능하고 쓸모 있어야 가치가 있고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날 좋아할 것이다'이다. 

혹시 이게 비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도 이걸 합리적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당연히 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고는 안타깝게도 자본주의가, 사회가, 학교가, 부모가 

새로운 사회 구성원인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착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이 메시지는 어느새 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틀 핵심에 자리 잡아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만들어준다.


당신이 유능하고 쓸모 있고 생산적이라면 해당 도식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테니 그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누리면 된다.

문제는 사람은 항상 유능하고 쓸모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는 사회가, 부모가, 자본주의가 원하는 만큼 유능하고 쓸모 있을 수 없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기를 예시로 들어보자.

가장 좋아하는 아기였던 '슈돌'의 건우. 아기를 안 좋아했지만 건우를 보기 위해 본방사수했다.

아기는 유능성이나 생산성 면에서는 가치가 없다. (인구+1의 생산성 말고.... 그건 잘 자란 이후의 이야기다)

오히려 아기는 무능하고 비생산적이며 쓰임새를 찾기가 더 힘든 존재이다.

그럼 아기는 가치가 없고 인정할 필요성이 없으며 애정을 받을 수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아기는 (건우이건 아니건) 있는 그대로 무조건적인 존재이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존중과 관심을 받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가 자라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면서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은 조건부가 된다. 

그리고 로저스라는 인본주의 상담의 대가는 

이 조건부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존중)의 시작이 개인의 이상적 자아의 발달을 막는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긍정적 존중과 관심과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런데 오랫동안 조건부적인 긍정적 존중만 받을 경우,

예를 들어 '시험을 잘 보면 칭찬해 줄게'라던지 '말을 잘 들으면 과자를 사줄게' 등,

칭찬과 인정이 타인의 조건이나 기준을 충족해야만 주어질 경우

사람들은 일정 조건이나 기준을 충족해야만 원하는 인정과 애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이 생각에서 오랫동안 자유롭지 않았고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런 내게 일이 줄어들거나 없어진다는 것은 

곧 내가 타인으로부터 사랑과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사실 더 무서운 건, 내가 나 스스로를 가치롭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좋은 상담자는 내담자 경험을 하고 교육분석을 받아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인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나는 유용함과 쓸모 있음에 대한 욕구(좋게 말하면 성취욕)가 강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일이 없는 상황은 스스로 좌절되기 딱 좋은 상황이며

이때 일 없이 쉬기만 하는 것은 내 멘털에 그렇게 좋지 않다는 점이다.

비수기와 성수기의 사이클이 있는 것을 알고 비수기 때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기만 하면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다.... 는 

내게 맞지 않다는 것을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았다.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쉼은 이런 느낌이었다.

작가 pikisuperstar 출처 Freepik
출처 Freepik 

휴식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느낌은 대부분 이런 느낌이다.

무엇보다 유튜브나 인스타에서 비춰지는 쉼에 대한 동기부여 영상들이 

실제로 나한테 맞는 쉼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이폰으로 대충 찍어도 이 정도 나오는 캐나다 로키산맥의 위엄.

반년 간 준비해서

작년 여름에 2주간 떠난 캐나다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전경이다.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항상 하나의 여행이 끝나면

바로 다음 여행 계획을 잡곤 했는데

이 로키 산맥으로의 여행은 기존의 다른 여행들과 달랐다.

최대한 길게 다녀올 수 있는 2주를 다녀온 것도 있었겠지만

이 여행에서는 정말 재충전이 된 느낌을 받았다.

아름다운 경치와 드문 인적과 깨끗한 공기는 누구에게나 '휴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데 충분하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이 자연에서 어떤 활동을 해야 진정한 '쉼'이 되는가는 다르다.


누군가는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느지막하게 일어나 

느긋한 하루를 보내며 책을 읽고, 

로컬 카페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가벼운 산책을 하고,

멍 때리며 야외에 앉아있는 시간이 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본 SNS 상의 영상들은 이러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오랫동안 이것이 진짜 휴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도할 때마다 이런 활동들은 내게 잘 맞지 않았다.

나에게는 오히려 약간의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유발했다.


캐나다에서의 2주는 대략적으로 이렇게 흘러갔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일출을 보며

베이글 집에서 베이글을 픽업해서 자연 풍경을 보며 먹고

2~3시간 정도 오전 트레킹을 한 뒤

길가 어딘가 적당한 곳에 주차해서 숙소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먹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2시간 정도 트레킹을 한 뒤

저녁에 돌아와 숙소에서 간단히 밥을 먹거나 근처 식당을 찾아가고

아직 백야여서 다운타운으로 놀러 가는 여행객들을 뒤로하고

일찍 들어와 밤 10시쯤 다음 날의 트레킹을 기약하며 잠들었다.

2주 정도 이런 생활을 하니 삶이 행복해지고 신체가 건강해졌고 자연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이게 나에게 맞는 쉬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100명의 프리랜서가 있다면 

비수기를 보내는 방법은 100가지가 될 것이다.

결국 비수기를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쉼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내게 맞는 휴식을 찾은 것처럼

나에게 맞는 비수기를 보내는 방법은 

주구장창 휴식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수입이 덜 들어오는 달에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다른 일(굳이 직접적인 수입이 되지 않더라도)을 찾는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즐거움과 재미를 더해 동기부여가 되게 한다.

그래서 찾아낸 일은 '가사노동 비용의 가시화'이다.

보통 집안일은 내게 큰 동기부여를 가져다주지 않는 활동이어서

등한시되곤 한다.

하지만 가사노동은 집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만약 내가 청소매니저라면-', '정리정돈 수납전문가라면-', 이라 가정하고

하루에 청소/정리정돈 한 시간*수당을 계산해서 그걸 가상의 수입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여러 청소/정리정돈 사이트를 찾아보니 

대략 청소는 10000원/시간, 정리정돈은 15000원/시간 정도가 요금인 것 같아

그걸 스스로의 시급으로 정했다.

참고로 2월 2일인 오늘은 오전에 정리정돈을 1시간, 청소를 2시간 했으므로 

오늘 내 3시간의 가사노동의 가치는 35000원이 될 것이다.

2월의 목표는 이렇게 가사노동으로 100만 원을 모으는 것이다.

(참고로 해보니 육체적 노력이 만만치 않아서 새삼 홈메이커들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다)

뭘 이렇게 복잡하게 

통장에 꽂히지도 않을 돈을 계산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까지 타인의 가치 (기준의) 조건을 쉬이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수기라 100만 원이나 덜 벌리네.....라고 생각하기보다

이번 달 퀘스트는 100만 원 가사노동으로 벌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에겐 더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릴 때부터 퀘스트 마니아였다.


이렇게 2월의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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