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쓰려고 했던 주제는 아니었지만 요즘은 도무지 힘이 나지 않는 나날들의 연속이라 느슨한 우울함에 대해 써보려 한다. 급격한 우울함을 겪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천천히 차곡차곡 누적된 우울함이 결국 역치를 넘어서 찾아온 적이 많았다. 살면서 겪은 우울한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이 그런 순간들이었다.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일은 많지만 결국 핵심은 정신건강을 다루는 일을 한다. 청소년과 성인 대상으로 심리교육을 진행하고 초등학교에서 상담교사로 근무 중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우울함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마치 직업인으로서 실패한 느낌이다. 정신건강 영역에서 근무하는 많은 전문가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효능감이 떨어져 있는 우울한 상태에서는 이런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느슨하게 사는 걸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얼마나 평소에 느슨하게 살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느슨하게 살고 싶다, 여유롭게 살고 싶다, 좀 더 편안해지고 싶다고 많이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실 빡빡한 삶을 살고 바빠야 내심 안도하며 평소 긴장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 이는 우울해서 필요 이상으로 냉철해진 스스로에 대한 폭로다.
인생의 대부분을 완벽주의자로 살아왔다. 완벽주의는 일종의 강박이며 인간의 심신을 갉아먹는 불안 덩어리고 행복의 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상적으로 분류될 만큼의 장애는 아니었고 이로 인해 입시나 취업에서 이득을 본 적도 있었기에 성취를 위해 완벽주의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삶은 결국 강제로 부하가 걸리게 되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기존의 부적응적 방식에서 적응적 방식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중이다. 브레이크가 걸린 지는 8년 전인데 감당가능한 삶의 속도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수용한 지는 사실 몇 년 되지 않는다. 지금도 온전히 수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시도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스며들듯이 차오르는 우울감은 특히 바쁠 때 찾아온다. 사람들은 프리랜서라면 자율적으로 일의 속도를 정할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프리랜서여서 타인에 의한 데드라인을 더 많이 경험하기도 하다. 조직에 속해있을 때처럼 9-6의 인생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타임 프레임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타인의 니즈에 맞춰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일을 쳐내기에는 수입이 걱정이다. 아주 잘 나가는 프리랜서라서 원하는 대로 시간을 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의 프리랜서는 아니다. 대스타들도 어느 정도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야 하는데 하물며 일개 프리랜서는…
전생에 일개미 출신이었는지 일이 없으면 불안하다. 항상 다음 일을 걱정해서 미리 일을 따놓으려 노력해서인지 몰라도 그 덕분에 일이 아예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자랑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저 말의 속뜻은 저강도이건 고강도이건 항상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지금은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저녁이나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최근 몇 달간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바쁜 몇 달이 우울감 증진에 큰 기여를 했다.
생각보다 에너지가 바닥나 있음을 느낀 건 이번 주였다. 몇 달 전부터 평일에도, 주말에도, 낮에도, 밤에도 계속 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이번 달만 끝나면’, ‘올 해만 끝나면’을 입에 달고 살기를 몇 달째였는데 어제는 약간의 호흡곤란이 왔다. 이미 그전에도 여러 차례 스케줄러를 보며 압도되는 느낌을 느꼈었다. 어떻게든 오늘 하루만 쳐내자라는 느낌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저께는 그렇게 좋아하는 상담을 하는 날인데도 아침부터 죽을 상이 었다. 분명 푹 잤는데도 에너지가 방전된 느낌이었고 스스로도 여유가 없는 걸 느꼈으며 어떻게든 일을 끝내기만 하자라는 느낌이었다. 신체화도 심한 편이라 복통과 위통에 이어 심한 편두통도 이미 몇 차례 겪었었다. 하루가 끝나면 좀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는데도 벌써 일주일 뒤의 상담이 두려웠다. 내가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것이 고스란히 내가 만나는 내담자들에게도, 청소년들에게도, 성인들에게도 갈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야 정말로 쉬어갈 타이밍이 되었다고 느꼈다.
물론, 계약으로 연명하는 프리랜서는 바로 그만둘 수 없다. 직장인도 사표를 쓰기로 결심하고 바로 나올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연말까지는 맡은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아도,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도, 나 자신을 위해 우울감을 느슨하게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앨 순 없겠지만 느슨하게 함께 갈 수 있으면 이것이 최선일 것이다.
느슨하기 위해 세운 스스로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지금 상태가 좋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 게이지가 충분히 찼고 그럴 만했기에 지금의 우울감에 대해 스스로를 탓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을 것이다. 올 해는 새로운 도전을 많이 한 해였다. 그만큼 많은 시도를 했다. 모든 시도가 만족스러운 금전적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노력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폄하했다. 연봉으로 보면 실패한 한 해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업무의 다양성이나 스스로 한 시도 차원에서 보면 처음 프리랜서로 입문했을 때만큼이나 도전의 연속이었다. 돈으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완벽주의적 사고를 버리려 노력 중이다.
2. 지금은 일을 ‘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최선임을 인정한다.
: 이 정도로 우울한 시기는 재난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긴급한 상황이다. 건물에 화재가 났을 때 사람들은 대피하면서 사무실 책상을 잘 정돈했는지, 컴퓨터는 끄고 나왔는지, 화장실 변기 물은 잘 내렸는지 등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일단 잘 대피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수업을 ‘잘’ 했는지, 상담을 ‘잘’ 했는지, 항상 스스로 평가하고 타인의 평가에도 귀 기울였지만 지금은 그 레이더를 잠시 꺼놓기로 했다. 대신 제시간에 상담/수업을 했는지, 일을 하며 플러스를 못 했더라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없었는지 등, 현상 유지 차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상담에 비협조적이고 비자발적으로 오는 내담자에게 상담에 오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는데 이제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말해주기로 했다. 펑크 내지 않고 일을 하러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일을 할 기분이 아닌데도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앞에 서는 것이 떨리는데도 도망가지 않았다고.
3. 일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보다 내가 무너지는 것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 프리랜서는 스케줄이 유동적인 만큼 언제든지 일이 끊길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다음 일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걱정 어린 이야기를 프리랜서 초창기부터 끊임없이 들었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있었기에 일을 하느라 한창 바쁠 때도 다음 계획을 세우고 구인 공고를 찾고 끊임없이 업무 기회를 탐색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래서 일이 끊기지 않는 성과도 있었다. 대신, 어느 정도로 일을 하면 충분한지 몰랐다. 항상 일과 돈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다음 달에는 이번 달만큼 일을 못 하거나 돈을 못 벌 수도 있으니 기회가 될 때 다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급기야는 다음 업무가 확정된 상태에서 잠시 뜬 시간도 견디기 어려웠다.
일의 부재는 무섭다. 자립해서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돈을 벌지 않는 순간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전에 받았었던 상담에서 남편이 있는데 왜 걱정하냐는 뉘앙스의 말을 듣고 많은 감정을 느꼈지만 남편과 별개로 난 스스로를 책임지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매달 지불해야 하는 생활비가 있다. 급여가 없어도 몇 달은 버틸 지불능력이 있지만 빠른 은퇴를 위해 이 저축액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돈을 벌 내가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현재가 행복하지 않으면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단순하면서도 무시되는 진실을 볼 수 있게 도와줬다.
4.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스스로의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
:연말까지 진행 중인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받지 않겠다. 한동안은 하루를 버텨내며 사는 하루살이 같은 삶의 회의감이 컸다. 지금은 절전모드로 상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를 버텨내면 그날의 유일한 할 일을 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잘 자고 잘 운동해야 함을 알기에 밥맛이 없고 속이 안 좋아도 속이 편안한 음식으로 최대한 편안한 환경에서 먹으려 노력한다. 몸에 좋은 음식을 신경 써서 먹으면 스스로를 아껴주는 마음이 든다. 운동할 힘이 없을 때는 스트레칭이라도 한다. 온라인 운동 프로그램을 따라가기 힘들면 틀어놓고 동작은 못 할지라도 폼롤러 위에서 구르기라도 한다. 큰 정리는 못 하더라도 설거지는 어느 정도 쌓이면 한다. 여유가 되면 목욕을 해서 몸에 쌓인 긴장을 푼다. 집이 좀 더러워지더라도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이 내키면 짧은 명상까지 한다. 힘이 정말 없을 때는 가사가 없는 노래를 듣고 약간 힘이 날 때는 좋아하는 디즈니 노래 같은 신나는 노래를 듣는다.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보살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