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신난다'

[우울증 환자 생존기] 나 자신을 만난다는 것

by 마담 J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예술가와 밥을 먹었다. 단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다. 두 시간 정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인상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맞아. 내가 선생님의 이런 통찰력을 사랑했지'라고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내가 담당하던 사업에서 만났고 이제 담당자가 바뀌어서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만났다. 그냥 한번 뵙고 싶어서 만났다.


요즘 내 근황 이야기를 했다. 상담도 받고 있고 투약도 하고 있고 얼마전 조울 진단도 받았다고. 프러덕션을 함께 하면서 라포가 형성된 사람이었고, 내가 늘 존경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밥을 먹는 사이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이 해준 말 중에 '단풍'과 '신난다'는 말이 남았다.


단풍을 보며 생각하셨단다. '아 그래. 광합성 하느라 너무 수고했구나. 이제 좀 쉬고 네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렴. 어쩌면 너는 지금이 너의 모습일거야'라고. 쉬어도 좋다고. 완경도 그런 거 같다고 했다. 열심히 일 했고 이제 나 하나만 생각하며 본연의 모습을 찾아서 살아가도 좋다는 의미인 것 같다고. 그래서 완경이라고.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완경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인상에 남았다. 한번도 단풍과 가을 낙엽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아쉬운 모습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내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가을 단풍과 나뭇잎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초록색도 아름답지만, 마지막에 자기 본연의 색을 드러내고 자기의 삶을 살다가 간다고 생각하면 가을 단풍과 나뭇잎들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지 않은가. 자기의 삶을 산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신난다는 말은 내 안의 신이 있다는 생각을 하셨단다. 내면 가족상담 기법에 대해서 알고 계셨다. 내 안의 많은 자아를 돌봐주고 바라봐주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신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난다'라고 할 때 그 신은 모두를 관장하는 내 안의 신이 아주 즐거운 것이 아닐까 생각하신다고. 내면 가족들 모두의 축제일 때 '신난다'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성당에 가려고 할 때, 신부님 말씀을 탈까봐 걱정하니까 큰 언니가 그랬다. '성당은 주님과 내가 독대하러 가는 거야. 세상의 모든 신부님의 모습을 합치면 하느님이래. 그러니까 신부님이니 주변 사람이니 탈 필요 없어. 그냥 너랑 주님이랑 독대하러 가는 단독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해'. 역시 현명한 우리 큰 언니. 선생님도 말씀하셨다. 다들 종교를 갖는 이유도 내 안의 신과 만나려고 하는 것 같다고. 신난다는 말은 내 안의 신과 만나는 것과 같은 뜻 같다고. 그러니까 신나는 일을 하라고. 신나는 인생을 살라고.




혼란스러운 와중이다.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울증이 왔고, 내일은 갑상선 호르몬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눈을 뜨고 하는 일상적인 일들, 이를테면 샤워를 하는 중간에도 그저 주저앉고 싶어진다. 산책 잘 하다가 뜻 없이 죽고 싶어진다. 맥락 파악이 어려운 일들과 배가 안 고픈데도 계속해서 뭔가를 먹고 결국 토할 때까지 먹고, 너무 먹어서 소화 에너지를 쓰느라 다른데 에너지를 쓸 수 없을 정도가 되는 이 모든 일들이 호르몬 문제일 수 있다는 의사의 추측이다. 이런 쑥대밭 가운데에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조증삽화가 지속되는 동안 만들어놓은 루틴 덕분이다. 순간순간 무너지는 가운데에서도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와중에 나는 나 자신과 맞딱드리고 있다. 무너지는 나와 일어서는 나.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야 다음 일들이 진행이 된다.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가는 건 쉬운 여정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가야겠다는 각성이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를 살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병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병이 주고 있다. 이 병이 나를 '나의 삶'으로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과 만나고, 나의 신과 만나는 일.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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