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적성검사에서 나는 우뇌와 좌뇌적 역량이 똑같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레고블록 조립이든, 그림을 그리든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집안 사정을 고려해 순수예술보다는 돈을 잘 버는 직업을 하고 싶았다.
위 조건에 부합하는 직업으로 광고 감독으로 정하고 서울예대 광고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선배들을 통해 광고 제작 아르바이트가 들어올 때면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참여했다.
2.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나가 촬영소품을 챙긴 후 가구CF는 가서 가구를 나르고, 음료CF에서는 동원된 엑스트라 관중들을 통제하고, 자동차CF에서는 물고기가 등장하는 씬을 위해 회사연수원 연못에 들어가서 붕어를 잡았다가 촬영이 끝나면 다시 놔주는 일을 했다. 낮 촬영이 끝나면 한남동쯤에 있는 어두컴컴한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제품과 모델이 등장하는 실내 촬영을 자정까지 한 후 촬영소품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새벽 2~3시... 막상 꿈꾸던 일을 해보니 내 체력으로 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조감독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도제식 체계여서 내가 열심히 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나다고 해도 대표감독의 눈에 들어 발탁이 되어야지 감독이 되는 체계라고 했다. 게다가 4년제 대학을 나와 대행사에서 PD를 하다가 감독이 되는 게 더 빠르다고 했다.
3.
나는 계획을 수정했다. 마침 IMF가 와서 졸업을 해도 취업이 안 되는 때라 1년 간 살면서 제일 열심히 공부해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편입을 했다. 새로운 교과와 학교에 집중하며 광고감독에 대한 꿈이 옅어질 무렵, PC통신 시대를 지나 ADSL이 깔리면서 다양한 웹사이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터넷 쪽으로 시대의 흐름이 크게 바뀔 거 같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고, 수직적인 업무체계를 가진 대기업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과 경쟁을 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새로 뜨는 영역에서 일하는 게 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관련 업무 중 나랑 가장 핏이 맞는 업무가 뭔지 책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웹마스터와 웹기획자라는 직업이 가장 비슷했고, 웹마스터는 신입이 바로 하기는 힘들 거라는 판단하에 웹기획자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고 그 일을 지금까지 천직처럼 하고 있다.
4.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나 대학교 2~3학년 때까지 기획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중학교 시절 스티브잡스가 만든 애플2 컴퓨터로 베이직이라는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었다.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빠지며 극장과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영화를 엄청 많이 봤다. 그리고 로드쇼, 스크린, 키노와 같은 영화잡지를 외우다시피 봤다. 대학생 시절에는 광고 동영상을 쉽게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로 플래시라는 영상 제작툴을 독학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컴퓨터 화면으로 채팅을 하는 게 재미있어서 PC통신을 열심히 하다가 회원 수 1만 명의 동호회 운영진까지 하게 되었다.
학교생활에서는 서울예대에서는 광고기획과 광고제작을 정규과목으로 공부하며 F-Vision이라는 광고촬영 동아리와 광끼라는 학회자 활동을 했고, 성균관대에서는 경영을 공부하며 교내 인터넷사이트 운영동아리 활동을 했다.
5.
기획자를 꿈꾸지는 않았지만, 되돌아보니 기획자가 되었을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이 빌드업 돼 왔던 것 같다. 자기가 어떤 직업이 맞을지 고민이 되는 후배들이 있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디테일하게 적어보면 어떨까 한다. 자신도 모르게 빌드업해 온 과거의 일들에서 본인의 적성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기획 또는 기획자 관련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댓글에 달아주세요. 선정하여 글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