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맞은 그날 이후, 승-3)
7, 8년 전인가, 건강검진을 하고 집에서 결과지를 읽고 있었다. 내 얼굴이 좀 굳었었는지 아이가 묻는다.
“엄마, 왜 뭐 심각한 거 있어?”
철없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엄마, 죽는대.”
“어? 뭐라고? 뭐라고?”
아이의 반응이 너무 심각해서(당연한 거겠지만), 장난을 길게 못 칠 것 같아서 급히 부사어 하나를 추가했다.
“엄마, 언젠가는 죽는대”
“뭐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아들, 언젠가 사람은 다 죽는 거야, 거짓말은 아니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그 남은 시간이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삼십 년이든, 오십 년이든.
그날이 분명 오기에 오십 년도 한 달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생각보다 아이가 너무 심각했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다는 것, 끝은 있다는 것을 왜 늘 시간이 많다며 살고 있을까.
몇 년 전의 이 장난이 무색하게 진짜 죽을지도 모를 상황(?)을 경험하고 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유병장수 시대라지만, 그 장수를 누리기에 유병을 극복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보다는 약 주고 병 준다는 말에 더 신뢰가 간다. 항암의 과정이 나쁜 것을 죽이기 위해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는 과정이라니. 참 역설적이다.
4개의 주사액을 7, 8시간 맞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주일은 쥐 죽은 듯 살 수밖엔 없다. 2주 차 땐 스멀스멀 기력이 올라온다. 3주 차 땐 그나마 정상인이 된다.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그 공포를 견디어야 한다. 21일마다 다시 팔뚝을 내어 주고 혈관찾기를 해야 한다.
이런 주기를 여섯 번 보내고, 그 후엔 가슴을 도려내는 수술, 그다음은 또 방사선, 그다음 또 14번에 걸친 표적 치료.
사람의 생명처럼 무엇이든 ‘끝은 있다’라는 믿음이 치료 중에도 통한다는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이 과정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희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