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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y 15. 2024

머리도 마음도 몰랐던 사랑

마르그리트 뒤라스 著, <연인> [장편소설]


- 제목 : 연인

- 저자 : 마르그리트 뒤라스

- 출판사 : 민음사




나는 지금까지 주로 현대 한국 소설, 산문, 시를 읽었다. 세계문학전집은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세계 문학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인데, 이 책이 아마 두 번째가 될 것이다. 세계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얼마 전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고 앞으로 <노인과 바다>, <호밀밭의 파수꾼>, <이방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유명한 작품과 장 그르니에의 작품집도 읽어 볼 생각이다. 고전 문학은 아니지만 <해리 포터 시리즈>도 소설로 읽고 싶다. 영화도 제대로 안 보긴 했지만.


이 책은 박연준 시인의 도서 에세이 <듣는 사람>에서 처음 접하고 흥미를 느껴 읽은 책이다. 워낙 문체가 어려운 작가의 작품인 데다가 내용이 복잡하고 정신없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걱정했지만,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소설 속 이야기와 인물들의 심리에 강하게 끌리는 느낌이었고 이 책을 읽은 것에 후회는 없다. 아마 나이를 먹는 동안 이 책은 몇 번이고 더 펼쳐 볼 것 같다.


책의 줄거리와 결말, 개인적인 해석이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린다.





머리도 마음도 몰랐던 사랑


이 책은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여느 자전적 작품이 그렇듯 소설로 발표되긴 했지만, 사실상 회고록이라도 봐도 무방할 듯하다.


사실 이 책은 현대 시점에서 보면 약간 문제가 있다. 소설의 화자는 열다섯 살의 프랑스 출신 백인 소녀인데, 그녀와 사랑하는 중국인 남자는 소녀보다 열두 살이나 많다. 미성년자가 자기보다 열두 살 많은 남자가 연애한다고 하면 그것을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 물론 이 책에서도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은 데다가 주인공이 미성년자이기에 남자와 이어질 수 없다는 언급이 여럿 나온다. 비단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 만약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 창작한 이야기였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서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작 자신의 열렬하고 싶은 사랑을 깨닫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사랑을 말하거나 사랑을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상대방을 사랑하고 아끼는지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가난한 형편인 데다가 가족들을 향한 애증과 연민에 휩싸여 있다. 나에게 가정은 따뜻하고 안락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위태롭고 차가운 물웅덩이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남편의 부재와 가난한 형편에서 오는 불안과 결핍을 큰아들을 통해 채우려 했으며, 어머니의 편애와 기대를 등에 업고 제멋대로 굴던 큰오빠는 훗날 도박 중독자가 되고, 나와 함께 어머니와 큰오빠의 지질하고 지난한 행태를 지켜보았던 불쌍한 작은오빠는 나중에 전쟁터에서 전사한다고 나온다.


이러한 가족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과 가르침을 받지 못한 나는 건강한 애정의 결핍을 겪었다. 그것은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에게 어떠한 불안감과 슬픔, 원망과 걱정으로 만들어진 구멍을 만들었다. 아마 나는 이러한 공허감과 우울감을 성적인 자극과 무의식적인 욕구로 채우려 한 것이 아닐까. 마침 그 시기에 나타난 부유한 남자는 소녀에게 진정한 연애 대상보다는 그저 자극적인 관계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자신을 추궁하는 어머니에게도 "제가 그런 남자를 좋아할 리 없잖아요!"라며 그와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한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제 마음속에 그를 향한 어떠한 사랑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작가가 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의 처절하고 냉혹한 본연에 대한 이야기다.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알지 못하고 그저 본능처럼 행한 사랑, 증오와 연민을 동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미 파멸이 예견되었던 이야기


나와 만나는 '그'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 나이도 많은 성인이지만, 진중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보다는 내내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인다. 나와 관계를 하면서도 울고 관계를 하고 나서도 운다. 나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복잡한 슬픔을 느낀다. 나와 그는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정작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야기 속의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인물의 시점과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기도 하고 ­― '나'라는 일인칭 호칭을 쓰다가 자기 자신을 '그녀'나 '소녀'라고 표현하거나, 인물의 이름 대신 대명사를 사용해 모호하게 나타내고, 과거를 회상하듯 말하다가 갑자기 시간이 훌쩍 지난 현실을 이야기하는 등 ― 감정 묘사도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이 정말 남자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남자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도 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이 책을 번역한 김인환 번역가는 해설에서 "누가 먼저 유혹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 남자를 사랑하거나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140p)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와 그는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아무래도 이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만큼 작가의 심리와 감정이 많이 녹아들어 있을 텐데, 두 사람의 관계성을 단순히 사랑이나 육체적 관계를 통한 쾌락이라고 정의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부가 요소가 있다. 당시 폐쇄적이었던 사회적 분위기와 뒤틀린 가정환경, 그로 인해 억압된 정신 에너지와 불안정하게 형성된 애정관 따위가 인물들을 둘러싸고 이야기 전반에 깔려 있기에, 그것들을 기반에 두고 두 사람의 마음과 관계를 조금씩 읽어내야 한다.


정신분석의 개념을 좀 더 확대하여 작품을 고찰해 보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글을 보고는 흥미가 생겼다. 인물들의 감정과 감정선을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도 나에게는 인간의 심리와 정신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없어서일까?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관련 지식과 사례를 많이 접하면 확실히 이 책의 주인공과 소녀가 사랑한 그의 마음을 조금은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생각했다. 과연 두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정반대로 서로를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고 갈구한 나머지 끝나버린 걸까? 나와 그는 별다른 계기 없이 정말 연인처럼 만남을 이어가고 육체적 관계를 가지는데, 나는 두 사람이 사랑을 자각하는 대신 본능처럼 느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작점부터 이미 이별과 파멸을 예고한 사랑을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서서히 덜어내는 것이라고. 본질이 꿰뚫린 사랑은 더욱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온갖 불안과 두려움과 갈등을 조성하여 사람을 몰아세웠다. 그것이 두 사람의 이별이 된 것이다. 소녀와 남자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너무 깊이 들어온 사랑은 아주 멀리 떨어져서 끝내 잡을 수도,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다는 것을.


김인환 번역가는 내가 아무런 미련 없이 그와 헤어졌다는 문장을 해설에 썼지만, 그것 또한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끝내 와해되어 영원한 이별이 되었더라도 두 사람의 사랑과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지울 수 없는 일종의 흉터 같은 흔적으로 서로의 마음에 오래 남았을 것이다.


p126 - 소녀는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처럼 일어섰고, 촐론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에 눈물을 터뜨렸으며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그에게 품었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떤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떠올리면 눈물이 먼저 나오는 것도, 떠올리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지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분명 사랑의 형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당사자들 또한 사랑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거나 무지해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뒤늦게 깨달은 진심조차 이미 손을 떠나간 꽃잎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영영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솟아올라서 동시에 흘려보내야만 하는 사랑이 슬프고 씁쓸하고 아팠다.




p14~15 -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마구 뒤섞인 모든 일들을 강한 자의식이나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내버려 둔 것도 아닌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뒤섞인 모든 일들이 매번 그 본질을 규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일에 흡수되어 버리는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과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살아가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감정을 전부 스스로 희석하거나 해소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방치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곪아버리거나 이내 망각하거나 회피한다. 아니면 또 다른 일에 묻히고 다른 존재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뒤라스가 말한 '이런 시기'는 과연 정확히 짚을 수 있는 시절일까. 아마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어떠한 때를 뜻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내면의 본질과 세상의 모습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자기 과시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자기 과시를 하는 것이다. 과시는 '내가 이만큼 잘났다'를 겉으로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 하는 일인데, 글을 쓰는 일이 과연 과시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싶다. 오히려 나의 결점과 허점을 보기 좋게 들키고 의도치 않게 흘려버리는 수치스러운 일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그런 감정에서 오는 일종의 안도감과 만족감 자체가 자기 과시와 합리화의 일종인 것 같다.




p92 - 하늘에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폭포처럼, 침묵과 부동의 물기둥처럼 빛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는 푸르렀고 손에 잡힐 듯했다. 푸른빛. 하늘은 그 반짝이는 빛으로 끊임없이 맥박 치고 있었다.

이 문장은 표현이 참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었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밤은 그저 으스스하고 위험한 세상이지만, 푸른 밤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환한 감색 하늘을 무수한 별빛이 빼곡하게 채운 모습일까. 푸른빛이 맥박처럼 퍼지는 밤의 모습은 시간을 초월한 다른 차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낮과 밤은 같은 장소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서 가끔은 다른 세상이 온 것 같다. 뒤라스는 분명 자신이 실제로 본 밤하늘을 묘사했을 것이다. 이런 장면마다 작가가 실제로 보았을 풍경이 궁금해진다.


뒤라스는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 덜 자란 아이와 더 자란 아이의 경계선에 있었던 열다섯 살 ― 우리나라로 따지면 대략 16~17살 정도일 것이다. ― 에 만났던 공허한 광기 어린 사랑을 이야기로 남겼다. 만난 순간부터 헤어짐이 예견되어 있었던 사랑. 끝내 사랑하는 동안에는 정체를 알지 못했던 '연애(戀愛)'에 대하여. 책의 제목이 그저 '연인(戀人)'인 것도 어쩐지 슬프다. 뒤라스는 그를 떠올리며 그가 자신의 연인(The lover)였음을, 그리고 자신이 그의 연인이었음을 인정했다는 게 아닌가.


책을 읽다 보면 의외로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와의 만남과 관계가 포함된 나의 전반적인 일생과 세밀하고 어둡고 복잡한 감정 묘사가 훨씬 자세하고 방대하다. 연애 소설이 아니라 일인칭 시점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상상하고 읽는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다 읽으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일 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야기가 평면적이지 않고 오래되지 않은 과거처럼 생생하다. 숨과 체온과 살냄새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비 냄새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이 책을 읽는다면, 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투명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먼 옛날에 떠나버린 뜨거운 사랑의 열기를 내가 겪은 일 같다는 미묘한 착각에 휩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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