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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07. 2021

[생각 3] 버스를 유턴하고 싶은 순간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뚜벅이 회사원은 내가 정한 시간에 집에서 나오기보다, 나를 회사까지 옮겨다 주는 대중교통의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선다. 많고 많은 뚜벅이 중 하나가 바로 나야 나.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은 집을 나서서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가기만 하면 바로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이 있는 초역세권이었다. 나에겐 최고의 집이 아닐 수 없었는데, 모두가 그렇듯 내 집이 아니면 언젠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십 년 넘게 1분 초역세권에서 살다가, 이제 지하철은커녕 버스정류장에서도 조금 떨어진 집으로 이사를 온 지 벌써 3년 차이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여유롭게 걸어서 11분, 뛰면 5분 정도 걸린다.



TMI를 덧붙이자면 일 작가는 100m를 20초 이내에 뛰어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 전력질주를 했다는 뜻이다.



 다행인 건 집에서 회사까지 한 번에! 다이렉트로 옮겨다 주는 감사한 버스가 있다. 불행인 건 그 버스의 배차간격이 평균 20분 이상이라는 거다.



어떤 날은 부랴부랴 출근 준비하며 미리 버스 앱을 보면, 배차간격이 40분까지 벌어진 적도 있었다. '와하하하하. 40분이래. 나한테 왜 그래요 버스님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 날은 비슷한 노선의 버스를 타고 환승을 하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주저 없이 택시 예약 앱을 켜야 했다.



 오늘은 조금 늑장을 부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10분 전에 나왔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데 주머니 속에서 카카오 버스 앱 진동이 가열하게 울렸다.

 



[승차 알람] 128번 버스가 5번째 전 정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승차 알람] 128번 버스가 4번째 전 정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승차 알람] 128번 버스가 3번째 전 정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 오시는 버스 기사님이 오늘 매우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셔서 액셀을 밟으셨거나, 급한 일이 있으셨나 보다. 버스가 너무 빨리 정류장에 다가오고 있었다. 집 대문을 닫자마자 등에서 덜그럭거릴 수 있는 백팩을 움켜쥔 채 미친 듯이 달렸다.



위의 TMI에서도 말했지만 일 작가는 정-말 달리기에 소질이 없다. 운동하지 않은 과거의 내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겨우겨우 달려 버스정류장 앞 횡단보도에 서니 버스가 딱! 횡단보도 앞 신호에 걸려있었다. 무교이지만 모든 신에게 감사를 빌었다.



 여유롭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버스정류장에 얌전히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카드를 찍고 제일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백팩을 앞으로 안았다.



마스크를 쓰고 뛰어서 숨이 너무 찼다. 버스 창문을 약간 열었다. 시원한 매연 바람이 불어왔다. 앞으로 몇십 분은 더 버스에 앉아 있어야 하니 가방 앞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았다. (TMI : 정확히는 에어팟 프로이다.)




^^?

없다.




와. 설마 내가 충전기 꽂아 두고 책상 위에 고스란히 놓고 온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럼 아니지. 정신 차려. 다시 잘 살펴볼까?




없다.

ㅎㅎ




 두 개의 버스정류장을 지나는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이어폰 하나 없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필수적인 아이템이었다.



책을 읽을 때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이용하는 걸 좋아하는 탓에, 걸어 다닐 때를 제외하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자주 사용했다. 난 현대 문명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다.



 버스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집에서 멀어져 회사에게 다가갔다. 코로나 시국인 지금. 나는 회사에서도 대부분 비대면 식사를 고집하는지라 이어폰으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즐겨보며 식사를 하는데, 오늘은 그것도 말짱 꽝인 셈이다.



허망함이 몰아닥쳤다. 버스에서 그냥 평소대로 책이나 뉴스를 읽을까 하다가도 이런 날이 또 언제 있겠느냐 싶어 멍 때리며 창밖 바깥 구경을 실컷 했다.



 본의 아니게 도심 속의 새소리, 차가 바삐 움직이는 소리, 매우 조용하게 밥 먹는 소리, 아가가 삑뽁삑뽁 신발을 신고 걷는 소리 등 평상시에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어서 10% 정도는 좋았다. 90%는 집에 온 뒤,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에어팟 케이스를 보며 좋았다.



뚜벅이들은 대중교통 이용 시 본인이 애용하는 책이나 기기, 이어폰을 꼭 확인한 뒤 출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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