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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May 10. 2024

급하게 잡은 숙소치고
너무 좋은데?

오로라 하우스

급하게 잡은 숙소치고 너무 좋은데?

오후 여섯 시 비행기. 우리는 충주에서 인천공항 가는 버스에 올랐어요. 넉넉하게 오전에 출발해서 공항에서 점심 먹고 구경하면서 돌아다닐까 했습니다. 이런 게 지방 사는 부부가 볼일 있어 올라가는 대도시에서의 소소한 소풍이자 하나의 낙 같은 거예요. 올라갈 일 있을 때 즐겨야 하거든요. 충주에는 커다란 건물 같은 건 시청 정도밖에 없단 말이지요.


출발 전에 뭔가 꼼지락꼼지락 하더니 작은 세이호 키링을 제 가방과 자기 가방에 하나씩 달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커플이라는 걸 티 내는 거예요.


커플 아이템!


그런데 우리 수하물 무게 한도가 15kg이었거든요. 캐리어를 막상 다 싸고 살짝 들어보았는데 이건... 15kg 넘을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애매한 거예요. 어쨌든 뭐 이 정도면 그 근처겠거니 싶어 관용을 바라보자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열흘 후 후회하게 되죠.


잘 기억해 두세요. 돌아오는 글에서 이 순간을 원망할 거예요. 아무튼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무인으로 수하물을 부치는데요. 세상이 참 좋아졌더라고요. 무인으로 이걸 부치다니. 


물론 레일마다 사람이 서서 무인으로 부치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요. 저희 어머니께서 요즘 무인 계란 판매점을 이용하시는 중인데 거기 사장님이 항상 앉아서 계란 사시는 걸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걸 듣고 그럴 거면 왜 무인 판매점인가요? 하고 묻곤 하거든요. 무인 수하물도 살짝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거기 서서 도와주시는 건 감사한데 이게 왜 무인..이라고 쓰여있는 건가요?


아무튼 아내 짐은 14kg, 제 짐은 16kg로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되었습니다. 하고 나서 아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면세품도 찾고요. 선글라스가 보고 싶다며 이것저것 써보는데 요즘 유행이라고 보여주는 것이 참 귀엽지만 한편으로는 자꾸 눈 쭉 찢어져서 군침 돈다 말하는 잔망루피가 생각나는 거예요.


- 이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야?

- 응! 힙하지 않아?


하면서 이리저리 쓰고 저를 보는데 이것 참. 유행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저를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 세대차이인가 싶기도 해요. 가격을 보고는 더욱 놀랐습니다. 이때다 싶어 저마다 손에 잔망루피를 들고 오는 직원들 사이에서 아내는 이것저것 받아 써보고 저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매장을 훑어보았습니다. 내가 드디어 아저씨가 되었나 보다 하는 순간이었어요.


저 작은 라바콘이 비행기의 주차를 막고 있다.


여차저차해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가는 동안 창가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우리는 노을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와 신기하다! 하면서 보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덜컹거렸습니다. 기류가 안 좋더라고요? 조금 무서운데, 하다가 출발 시간이 6시이고 도착시간이 10시이니 4시간만 참으면 된다고, 그동안 해지는 거, 바다구경 하면서 금방 가자고 둘이 손잡고 잘 갔습니다.


노을 사진인데 구름이 많이 껴서 지금 보니 표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요


중간중간 음식 냄새가 났어요. 엇, 저녁시간이니까 기내식 주나? 하면서 뭔가 군침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승무원들을 보면서 기내식? 안 주나? 하면서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다 먹은 것 같은 빈 그릇을 치우는 승무원들이 보였고, 폭력적인 음식냄새에 못 이겼는지 하나 둘 아주머니들이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면서 먹을 걸 꺼내는 걸 보았어요.


- 기내식 안 주나 봐.

- 음? 밥을 안 줘? 정말?

- 그래도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아보자.


그런데 10시가 넘어도 도착할 기미가 안 보이는 거예요. 10시 반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지극히 논리적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 10시가 현지시간이구나!


그래요.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2시간 빠르고, 그러니 현지 시간 10시 도착이라면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12시가 되는 거였습니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2시간 더 비향기를 타야 했어요. 저는 그제야 4시간이면 뭐 가뿐하지!라고 생각하며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아무것도 받아가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어요. 그거 아시나요? 원래 결핍은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더 배가 고파지는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죠. 조금만 참았다가 내려서 맛있는 거 먹자, 는 이제 뭐 파는지 좀 보자, 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승무원이 기내식을 판매한다는 말을 듣고 다급히 불렀어요.


만 원짜리 컵라면


그리고 작은 컵라면을 하나에 오천 원씩, 만원을 내고 샀습니다. 가격을 듣고 솔직히 큰 컵이 올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우리는 먹기로 했어요. 뚜껑을 열었을 때 풍겼던 그 폭력적인 라면스프의 냄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새벽부터 한라산 오름을 올라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우리는 어딘지도 모를 숲 속을 열심히 기어올랐고, 오른 끝에 여기 왜 있을까 싶은 작은 오두막 매점을 발견했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판매하는 시중가의 열 배짜리 초코파이와 포카리 스웨트를 보며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시장 법칙을 몸으로 깨닫게 하려는 선생님의 수작인지 의심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때 가지고 있던 용돈의 상당량을 털어 다 녹은 초코파이와 미지근한 포카리에 눈물인지 모를 짠맛을 섞어 먹은 기억이 났습니다.


- 기내식도 안 주고 나쁘다.

- 맞아! 나쁘다. 근데 라면 맛있네?

- 그치? 약간 이렇게 먹어서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 근데 기내식 안 주는 건 너무하다.

- 맞아 너무하다.


너무한 건 알아보지 않은 우리였겠지만요. 귀국할 때는 먹을 걸 손가방에 사서 타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도착시간이 다가오자 불현듯 머릿속에서 뭔가가 스쳐지나갑니다. 다급히 1박을 예약한 공항 근처의 숙소. 거기 체크인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은데? 몇 시였더라!?


비행기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봅니다. 체크인 마감시간은 11시.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이 남았습니다. 


- 이야, 이거 못하겠네.

- 설마 늦게 가면 로비에 재우겠어?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가 보자.

- 그래 일단 가보고 체크인 못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신혼여행을 발리로 갔던 우리는 입국에 몇 시간이 걸리고 숙소까지 가는데도 몇 시간씩 걸린 기억이 있었어요. 그래서 푸꾸옥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깐깐하게 보는 입국심사와 비자 발급, 그리고 죄지은 오토바이들과 차들이 모인 것만 같은 도로 위의 바퀴지옥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웬걸? 입국 심사는 줄이 길었지만 발리에 비하면 너무나도 간단하게 통과시켜 주었고 여권에 도장을 찍자마자 바로 출구가 있었어요.


엥? 하면서 나가는데 대문짝만 하게 '환전소'라고 쓰여있는 네온 간판이 보였습니다. 저는 처음 나오는 건 일단 거르고 봐야 한다는 주의자입니다. 비교군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합리주의자이지요. 저길 지나서 출구 전에 나오는 환전소가 있으면 환율을 비교해 보고 환전을 하자! 하고 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지나자마자 출구였어요. 엥? 이렇게 짧아? 엥?


출구 앞에서 택시? 호텔? 어뒤가요? 하는 호객꾼들 앞에서 그대로 유턴하고 가시 가서 환전했습니다. 환율도 좋게 쳐주더라고요. 아주 만족. 여기까지가 한 40분 걸린 것 같아요. 숙소까지는 차로 한 10분 정도. 일단 나가서 호객하는 아저씨들 중에 웬만하면 바가지 좀 쓴다 치고 빨리 갈 수 있는 차로 가보자고 나왔습니다.


- 텐 돌라!


아씨 좀 센데. 그래도 자신 있게 갈 수 있다는 기사님 말에 두 명 텐돌라 확실하냐고 거듭 물어보고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발리에서 택시 바가지 거하게 당한 경험이 있어서 정확히 물어보았어요. 체크인 시간이 촉박하니 빨리 갈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요? 도로에 차가 없는 거예요! 세상에 너무나도 쾌적한 도로를 달리면서 교통은 여기가 발리를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밤중이라 밖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리에서도 자주 보던 현지 노점들이 보이고 거대한 야자들과 정글을 보며 역시 한국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10분도 안 걸려 도착한 우리의 첫 숙소는 이름도 근사한 '오로라 하우스'. 대로에서 숨어있는 것 같이 보이는 좁은 골목을 들어가 숲을 헤치며 들어가면 환하게 붉은 나무 조형 위로 오로라 하우스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1박에 2만 원이 안 되지만 나무로 만들어 반짝반짝하게 광이 나도록 닦은 로비가 너무나도 예쁘고, 숙소 전체를 가로지르는 수영장이 멋진, 시크한 고양이가 심드렁하게 반기는 매력적인 숙소였습니다. 급하게 잡았는데 너무 예뻐 탄성이 절로 나오는 곳이었어요.


다음에 또 갈게요


체크인하는데 의자 위에 무슨 털뭉치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순간 너무 놀랐어요. 고양이 박제인가 싶었거든요. 인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털이 사실적이고, 뭔가.. 그 느낌이 딱 오잖아요? 살아있다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없으니까. 그래서 혹시 아내가 보고 놀랄까봐 조심스럽게 몸으로 가리고 슬쩍 손으로 건드려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늦었어요. 아내가 그 털뭉치를 발견하고 꺅-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순간 그 털뭉치 귀가 살짝 움직이는 걸 보았어요! 맞아요. 이 친구는 살아있는 고양이였던 것입니다. 어찌나 귀찮음이 많고 새침한지 우리가 근처에서 그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움직임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발견당하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시달리기 시작했지요.


결국 로비 뒤편에 있는 계단으로 도망가버렸습니다. 한 번만 이쪽을 봐달라는, 아이돌 보는 팬의 심정으로 외쳐보았지만 이 새침냥이는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어요.


표정부터 새침한 게 아주 천상 고양이여

숙소는 참 좋았습니다. 가운데 긴 수영장이 있고 수영장을 따라 두 면으로 건물이 ㄴ자로 길게 있는 구조였어요. 방은 문 있는 면이 모두 유리로, 햇볕 들면 정말 예쁠 것 같은 그런 곳이었어요. 체크인하고 캐리어를 방에 넣자마자 우리는 근처 마트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베트남은 모기가 엄청나서 반드시 살충제를 뿌려놓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분명 이 방에 걸려있는 열쇠인데 열쇠 구멍에 안 맞는 거예요. 엥? 저는 당황했지만 이 정도는 대비를 했단 말이죠. 캐리어를 모아놓은 다음에 준비해 간 자전거용 자물쇠로 방 안에 있는 가구에 손잡이를 묶어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준비성이 좋은가요.


 그렇게 단속을 해놓고 나서 우리는 근처 마트로 가보았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하루 더 묵고 싶은 모습의 수영장


마트는 현지느낌 가득한 마트였습니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바로 맞은편에 뭔가 단출하지만 들어가 보면 꽤 넓은 마트가 있었어요. 우리는 코끼리가 그려진 점보 어쩌고 하는 커다란 살충제와 함께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보았습니다. 코끼리가 그려져 있으니 믿음이 가더라고요. 개중에는 수박만 초코파이가 눈에 들어와 냉큼 집어보았습니다. 한국과자도 굉장히 많이 보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먹기는 아쉬운 마음에 최대한 현지어로 되어있는 과자를 먹어보자고 했습니다.


이게 그렇게 맛있다고 샀는데 글쎼요. 한 상자는 조금 과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푸꾸옥에 와서 처음 먹는 과자! 숙소에 가서 하나 까먹어보았는데 맛있었어요. 크기가 아주 작아서 두 개는 먹어야 성에 찼습니다. 사실 초코에 대한 기대를 좀 했었는데요. 그렇게 맛있진 않더라고요.


어쩌면 맛이 그렇게까지 좋진 않았는데 맛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기가 막 날아다니더라고요. 역시 베트남은 모기의 나라다, 하면서 아내는 씻으러 들어갔고, 저는 살충제를 좀 뿌렸습니다. 한국에서 팔던 만만한 무향 에프킬라를 생각하고 넉넉하게 구석구석 뿌렸어요. 그리고 이제 뭔가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코끼리가 그려져 있던 건 코끼리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나?


목이 아프고 눈이 따갑기 시작했습니다. 모기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었고요. 나갈까! 하다가 씻고 있는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이대로 아내를 두고 나간다면 이건 배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었던 거죠. 이대로 문을 열어? 아니야 그럼 이거 뭣하러 뿌렸어. 새로운 모기가 신선한 공기랑 들어오면 이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잖아. 어쩌지.


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다가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대고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며 호흡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삭 캐리어에 있던 스노클링 마스크가 생각났지만 그걸 꺼낼 시간에 그냥 이 살충제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그런데 문쪽 벽이 전부 유리라고 했잖아요? 씻고 나올 아내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커튼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입과 코만 밖에 내놓고 숨 쉬었습니다.


푸꾸옥에서의 첫 밤은 그런 흉한 모습으로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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