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하는 일

by 싱지원

입사한 지 1년쯤 됐을 때, 10년 차 선배가 하던 시사 프로그램을 어쩌다 맡게 됐다. 정말 어쩌다였다. 선배는 새 프로그램 론칭으로 바빴고, 당장 2주 뒤 녹화부터 기존 진행자 대신 새 진행자를 앉혀야 하는데 당장 별도의 지출이 없는 회사 내부 인력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돈과 인력 모두 부족한 지역에서는 신입 아나운서에게도 기회가 금방 찾아온다.

변호사, 정치인 서너 명과 둘러앉아 매주 다른 사안에 대해 한 시간가량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인터뷰 경력이라고는 라디오 인터뷰뿐이었고 그마저도 일대일로 이야기만 나눠봤는데 다수의 출연자가 있는 TV로 옮겨가니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두 시간씩 헤어 메이크업을 해야 했고, 듣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잡히니 녹화 시간 내내 허리를 곧추 펴고 앉아있느라 진땀을 뺐다. 작가가 써준 질문지는 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옆길로 샐 때가 있었으니 그때마다 '선생님, 이 길이 아닙니다'라며 다시 가던 길로 모시고 오는 일, 군데군데 논리적으로 빠진 부분도 꼬리 질문으로 채워주는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출연자도 나도 서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헤맸고, 출연자 얼굴과 이름도 매칭이 잘 안 되는 상황이었던지라 다음 발언 순서를 알려주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리 만무하다. 출연자가 말을 하고 있는데 진행자는 고개를 처박고 원고를 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군데군데 잡혔다. 그렇게 첫 녹화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내부 평가가 있었지만 예의와 배려로 잘 포장된 리본을 풀고 보면 '처음이니 봐줄게'라는 하찮은 내용물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첫 녹화를 하고 집에 가는 길에 속상해서 눈물이 다 났다. 울고 나서 달라졌다면, 그러니까 금방 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매주 '나쁘지 않은' 방송을 하는 것도, 그런 방송을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여느 날처럼 속상한 마음을 안고 퇴근하는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울분을 토해냈다. 일단 화면에 너무 못생기게 나와서 짜증 나고, 논리가 빈 구석에는 질문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게 현장에서는 마음처럼 잘 안되고, 녹화 전에 출연자들의 긴장을 풀어줘야 하는데 내가 더 긴장되고...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10년 차 선배가 하던 프로라면서. 일 년 차가 잘하면 그 선배는 뭐가 되니? 하루아침에 잘하는 일이라면 노력할 가치도 없다. 그만 울고 밥이나 챙겨 먹어" 아주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나의 조급함을 꾸짖듯이.


그 통화를 한 다음 날부터는 당장 나아지리라는 욕심은 조금 내려두었다.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 내가 꿈꾸던 진행자의 모습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출연할 사람들의 사진을 프린트해서 책상에 세워놓고 질문을 던지는 연습을 하고. 주제와 관련된 기사를 훑어보고 공부했다.


얼마 안 가 그 프로그램은 막을 내렸지만 새 프로그램을 맡을 때마다, 조바심이 날 때마다 그날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성실한 태도, 거기에 시간만 더하면 세상에 못해낼 일이 없을 것 같은 무한한 자신감이 생기는 말.


‘시간이 하는 일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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