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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Mar 31. 2022

아니,  어린애가 세면 얼마나 세다고!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는 날, 나는 통지표를 들고 신나게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선생님이 나한테 세다고 칭찬해 주셨어!”

엄마는 내 통지표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아니, 어린애가 세면 얼마나 세다고 참!”

나는 그 말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엄마 얼굴을 보고 알았다.

통지표에는 ‘고집이 세다’라고 씌어 있었다.     


어릴 적에 난 부끄럼을 많이 타고 발표를 하려면 심장과 목소리가 벌벌 떨리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싸우지도 않았고 혼날까 봐 숙제도 꼬박꼬박 했다. 그때는 한 반에 60명이 넘어서 선생님과 얘기해 본 기억도 별로 없다. 그런 내가 무슨 고집을 부렸다는 걸까? 혹시 선생님이 나와 다른 아이를 착각한 건 아닐까?

교사가 되고 나서 나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혹시 전학을 갔다 온 게 이유였을까?

2학년 때 나는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되었다. 여름 방학 때 연년생 남동생과 시골 외갓집으로 놀러 갔다가 거기서 살게 되었다. 한창 바쁜 부모님 대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선뜻 우리를 돌봐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방학이 끝나자, 나와 남동생은 외갓집 근처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갔다. 나는 아침마다 그 동네 아이들과 같이 모여서 학교까지 걸어갔다. 학교는 생각보다 멀었고 덕분에 나는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다. 시골 학교는 서울과는 사뭇 달랐고, 뭔가 느슨하고 여유가 있었다. 반 아이들 수도 적었고, 돈을 내지도 않았는데 모두에게 빵을 주었다. 숙제도 별로 없고 공부도 쉬워서 부담 없이 학교에 다녔다. 시험도 곧잘 봐서 나는 그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서울 아이로 통했다.      


집에 올 때도 동네 아이들과 같이 걸어왔다. 집에 오면 책가방만 내려놓고 동네 아이들과 뒷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밤과 도토리를 줍고, 감나무에서 감을 따서 먹었다. 앞집에 사는 아이는 자기 할머니한테 가자고 했다. 앞집 할머니는 손녀딸 친구가 왔다며 반가워하더니 감춰 놓았던 막대사탕을 꺼내 주었다. 얼마 되지도 않아 난 시골 학교와 동네에서 친구도 생기고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래도 밤이면 부모님이 그리웠다. 다행히 부모님 형편이 괜찮아졌는지 두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왔다. 그리고 예전에 다니던 학교, 같은 반에 그대로 배정이 되었다. 나를 다시 만난 선생님은 반 출석부를 보여 주며 내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분명히 난 두 달이나 시골 학교를 다녔는데, 서울 학교도 다닌 것처럼 이름이 있었다니 이상했다. 그렇게 난 전학을 간 건지 안 간 건지 애매한 상태로 2학년 남은 기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서울의 2학년 담임선생님은 어디서 내 고집을 찾아낸 건지, 내 고집은 어떻게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혹시 선생님은 시골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헷갈리지는  않으셨는지, 내가 아니라 앞뒤에 다른 애들에게 써줘야 하는 걸 나에게 써 준 건 아닌지 궁금하다.      


단 하나 걸리는 부분은 있다.

여전히 서울 학교 출석부에는 내 이름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분명히 두 달 동안 시골 학교를 다녔다.

그동안 내가 좀 변했다는 거다. 시골 학교에서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라고 관심을 받았다. 서울에서는 60명 중의 한 명이었는데 시골에서는 전학생 한 명이었다. 두 달 있는 동안 시골 학교 선생님은 서울 학교 선생님보다 나에게 더 많은 걸 물어보셨다. 전학 간 그날부터 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공짜 빵을 먹고, 같이 걸어서 등하교를 하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아갔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나 보다.     

 

다시 서울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난 예전의 나로 돌아가서 작은 존재임을 느껴야 했다. 여전히 그 반에는 잘 난 아이들이 많았고, 발표 잘하고, 공부 잘하고, 잘난 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시골에서는 그냥 모두가 다 소중한 친구들이었는데. 시골에 머무는 두 달 동안 나는 그걸 느끼는 아이가 되었나 보다.      



교사가 되어 통지표를 쓸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선생님이 써 준 ‘고집이 세다’는 말을 기억했다. 나처럼 어른이 돼서도 왜 그런 말을 써 주었는지 궁금해하거나, 속상해하는 아이가 없기를 바라면서.      


교사 모임에서 이런 주제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릴 적 이해 불가의 통지표를 받은 적이 있냐고 했더니 유난히 눈이 큰 남자 선생님이 ‘소의 눈처럼 순박하고 순수하며……’라는 걸 받았단다. 그 선생님의 부모님은 며칠을 고민하다 담임선생님께 물었단다. 왜 하필 소눈이냐고. 담임 선생님은 시골 출신이라 자기 눈에는 소의 눈이 그렇게 좋게 보였다며 어쩔 줄 몰라했단다.     


어떤 교사는 학교에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집에 가는 학생에게 뭐라고 써 줘야 하나 고민이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아무 하는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쓸 수도 없고.

거기 모인 교사들은 그건 아니라며 다 같이 말렸다.       


나도 아이들에게 통지표를 쓸 때 매우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보니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주관이 강하다’라는 말을 쓰고 싶으셨을까?

어릴 때라 그게 고집으로 보였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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