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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소

가장 깊숙한 곳의 로맨스

by 평 화

1

깨끗하게 사용한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을 정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집 안 모든 창문을 열었다. 이불 빨래를 먼저 해야겠다. 물 가득 받은 빨래통에 들어가 무게로 짓눌러 청춘 드라마를 찍듯 발로 밟고 싶었지만, 아껴야 했다. 이불은 세탁기에게 맡겨두기로 하자.


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부터 시작하자.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바닥에 내려앉을 테니, 탈탈 털어버렸다. 생각보다 많은 먼지들에게 뒤덮였다. 매일 쓸고 닦고를 반복했는데도 사라지지 않은 것인지, 나 몰래 숨었던 건지.


기계음이 들리고 나서야 질긴 먼지와의 싸움이 끝났다.


“이 상태로 이불을 꺼내면 다시 더러워지려나?”


아침에 일어나서 꺼내 입은 옷이라 다시 갈아입기 껄끄러웠지만, 이불이 더러워지는 건 더 용서할 수 없으니 갈아입었다. 바깥으로 나가 누군가 만들어 둔 건조대에 이불을 널었다. 어느 건조 기계를 가져와도, 저 위에 있는 것을 이길 수 없을 거다. 아주 날을 잘 잡았다.



2

두세 번 걸레를 빨고, 알맞은 크기로 접어준다. 그 뒤는 두 팔과 두 다리 차례다. 쭉 달리다, 턴하고 또 달린다. 지치기 전까지 얼른 해치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닦이냐!”

“할머니처럼 하면 무릎 망가져!”


할머니는 청소가 끝나면 무릎을 어루만지시면서도 굳이 고양이 자세로 조금씩 움직이며 닦으셨다. 저 자세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차라리 앉아서 조금씩 닦으면 될 텐데, 알려줘도 들은 체도 안 했다.


“할머니처럼 할까 보냐 “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 바닥 닦기를 끝냈다. 정말 끝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뛰질 못하겠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이는 게 흉했을 거다. 시원한 물 한 잔 들이키고, 주방에 온 김에 손대기로 했다. 장을 열어보니 안 쓰는 그릇들 천지였다. 분명히 저기에도 먼지가 한가득일 텐데, 그냥 닫아버렸다. 나중에 하자.


물때가 생긴 곳은 분무기에 담아둔 식초로 해결하면 된다. 코를 찌르는 독한 것은 따뜻한 물을 머금은 행주가 해결해 줄 테니.


“식초 냄새가 고약해. 그래서 물때가 사라지는 거야?”


몰라도 모른다고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려나. 잘못하고 사과 안 하는 나에게 꿀 먹은 벙어리냐며 핀잔주던 할머니, 당신도 나와 같았네요. 어쩌면 그런 할머니를 알기에 더 골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껏 구겨지는 표정과 빨라지는 행동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3

작은 방 탁자에 놓인 성모 마리아상 앞에 앉았다. 왼쪽으로 기울인 고개,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볼 때마다 묘했다. 할머니는 이 자리에 앉아 무엇을 빌었을까. 수십 번, 수백 번 이 자리에 앉아 봐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종교 없는 나에게 기도란 역시 어렵다. 그래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건 으레 알고 있었기에, 닦아드리겠다는 말 한마디를 닿지 않을 곳에 전하고 갓난이 닦듯 조심스럽게 닦아드렸다.


할머니 따라 성당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만개한 벚꽃나무들 뒤로 궁전 같은 성당을 보았을 땐 어린 마음에 계속 다니고 싶었던 것 같다. 할머니 옆에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었다. 아주 큰 성모 마리아상이 자꾸만 시야에 걸쳐져서 심기가 불편했던 기억도 있다. 할머니는 어디서 난 건지 하얀 자수 손수건을 머리 위에 얹으시곤, 두 손을 모아 평온한 얼굴로 중얼거리셨다. 처음 본 할머니 모습이 신기했다. 미사 시간 내내 할머니 얼굴만 바라봤던 것 같다.


최고의 기억은 기도가 끝나고 커다란 할아버지가 손수 먹여주신 하얀 사탕이었다.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기분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아주 달달했을 것 같다.



4

대청소를 다 끝내고 나니 내 안의 모든 것이 후련하다. 내가 닿는 시선엔 먼지 한 톨 없어 꽤 훌륭한 청소 솜씨를 가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쯤 눈에 들어온 그릇장이 거슬렸다.


“어쩌면 좋으려나.”


장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한 뒤 무언가 결심한 듯 장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이 많은 그릇은 할머니의 손을 거쳐갔을까.

그릇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누렇게 변하거나 금이 갔거나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검은 것들 투성이었다.


"왜 버리지 못하고 고이 쌓아둬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지."


“엄마! 할머니 싱크대 장에 있는 그릇들 상태 완전 메롱 인데, 버릴까?”

“안 돼! 그 그릇들이 어떤 그릇인 줄 알고 버려!”


그렇게 십여 분 통화 후, 내 귀가 온전한지 확인해야 했다. 남아있는 그릇들은 할아버지가 시내에 나가 한 장씩 사 온 것들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처녀 때부터 커피잔이나 그릇들을 좋아해서 결혼하면 누가 봐도 예쁜 그릇과 잔을 모으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뒤늦게 아신 할아버지가 사다 주셨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 로맨틱했네”


감동은 잠시, 현실은 베이킹 소다 반죽이었다. 오래된 것들이다 보니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볕이 좋은 날이니, 널어둔 이불 근처에 돗자리를 펼쳐 하나씩 두어 하늘에 맡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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