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무게가 있어.
1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개들과 한바탕 뛰어놀았다. 내가 뛰면, 그들도 나를 따라 뛰는 것이 좋았다.
내가 숨으면, 나를 찾는 부름이 듣기 좋았다.
잔디가 따갑게 찔러대도 나는 온몸으로 그곳을 눌러댔다. 익숙해질 터, 잠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다. 가만두지 않는 녀석들이 큰 방해꾼이었지만, 얼굴에 묻은 녀석들의 끈적함이 씻겨달라 외쳐대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피로를 이곳에서 쏟아내고 싶었다.
아—푸르다.
녀석들도 나와 함께 피로를 풀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잎을 타고 나도 저 멀리 날아갈 테다. 나의 작은 기척에 무슨 일인가 일어나 바라보는 얼굴은 이 각도에서 참 우스꽝스러웠다. 한껏 껴안아 버릴 만큼.
2
개들과의 시간은 즐거웠지만, 인간의 체력으로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뭐라도 먹고 나서 또 뛰자. 나 배고파.”
광장 슈퍼였던 곳이 언제 칼국숫집으로 바뀌었을까. 아무렴 어때. 지금 이 허기짐을 채울 수만 있다면 뭐라도 좋았다.
칼국수와 함께 먹는 찐만두가 좋아서 칼국수를 사 먹곤 했는데, 이곳은 찐만두를 팔지 않아 만두 칼국수를 골랐다. 칼국수에서 가장 중요한 건 김치의 맛이라, 먼저 겉절이를 맛봤다. 갓 담은 김치는 밍밍한 칼국수라도 단숨에 끌어올릴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만두 칼국수는 두세 명이 먹어도 될 만큼 푸짐했다. 젓가락을 들기 전, 문득 눈길이 멈췄다.
“왜 안 먹고 보기만 혀?”
“어? 잘 지내셨어요?”
엉뚱한 대꾸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나로선 반가운 마음이 더 커져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슈퍼 주인아주머니였다.
“저기 파란 대문 집 손녀인데, 기억하세요?”
나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사람. 그녀는 나의 가족 모두를 알았고, 내가 모르는 것까지 알고 있어서, 잠시나마 내 가족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알아봤냐는 물음에는 오래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큰 점, 빠글거리는 중단발 파마,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 하지만 그대로 말하기엔 새침한 기질이 떠올라, 그저 미소로 무마했다.
3
“박 씨 고집을 누가 꺾어?”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제야, 엄마가 거짓말한 줄 알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식들이 늦게 들어오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방망이 두 개를 들고 대문 앞에 서 계셨다고 했다. 파란 대문 앞에서 씩씩대고, 발을 구르고, 서성거리는 모습은 이웃들 눈에는 참 기묘했을 것이다.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으나, 오히려 순찰대를 뽑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순찰대가 생겼지만, 할머니는 끝내 자신이 해야 직성이 풀리셨던 모양이었다.
만두 칼국수는 멸치 육수로 담백했고, 밀가루 풋내 없는 면발은 손수 뽑은 것이 확실했다. 익어갈 즈음 넣은 작은 만두는 탱글탱글했고, 씹을수록 들깨의 고소함이 퍼졌다. 김가루의 짭짤함이 감칠맛을 더했고, 여기에 겉절이를 곁들이면 완벽했다.
칼국수가 맛있다는 평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슈퍼를 접고 면 장사를 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내로 물건을 사러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 장사가 점점 어려워졌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몸이 근질거려 결국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면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성격도 예전 그대로였다.
“아주머니, 화끈하심은 변함없으시네요.”
4
칼국수의 양은 틀림없이 많았고, 이야기에 배까지 불러 결국 남겨버렸다. 남은 걸 싸달라 했더니 돌아오는 건 보따리였다.
“오늘 담근 김치인디, 맛나게 잘했지?”
“시골서 뭐 먹을 게 있다고 눌러앉았냐?”
답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말에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다. 어떻게 다 먹느냐는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 바삐 움직이는 그 작은 손에, 나는 또 져버렸다.
가볍게 들어온 몸이 나갈 때는 한 발 디디기조차 어려울 만큼 버거웠다. 양손 가득 쥐어주신 보자기는 다음에 돌려드리자 했지만, 그녀의 빈 손은 너무도 가벼워 보였다. 뉘엿뉘엿 져가는 해가 조금만 더 천천히 머물러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마음과 달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순찰대도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도 옅어져 빠르게 걸어야 했다.
괜히 칼국숫집을 찾았나, 괜히 아는 체를 했나. 못된 생각이 스치던 순간, 등 뒤로 큰 외침이 날아왔다.
“천천히 가! 내가 보고 있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