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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의 기록

by 평 화

1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겉옷을 챙겨 밭에 나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오늘도 나는 게으른 지각생임을 깨닫곤 한다.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배추와 무가 자랐다. 떨어지는 잎들은 가을 준비에 한창이었고, 제 모양을 갖춘 것들은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일과는 웅성대는 소리를 확인하고 흙을 한 줌 쥐어보는 것이다. 손에 닿은 흙은 밤사이 얼마나 추웠는지 알 수 있었다. 온전히 잡을 수 없이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흙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목이 말랐구나.”


며칠간 늑장 부린 만큼, 물방울들이 빛을 마주할 때쯤 집으로 들어간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칼국숫집 아주머니가 주신 말린 돼지감자를 우렸다. 쌀쌀한 날씨에 물까지 뿌리니, 한기가 돌아 감기라도 걸릴까 봐 천천히 들이켰다.



2

시골에 오면 정갈하게 밭을 꾸며놓은 것들에게 자꾸 시선을 빼앗기는지 모르겠다. 나는 배추와 무뿐인데, 여기저기 다양한 것들이 심어져 있어 볼거리가 많다. 시골은 결코 재미없는 곳이 아니었다.


“아가야!”


마을 회관이 생기고 처음 들어가 봤다. 먼지 한 톨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어르신들의 부지런함은 시골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갓 찐 고구마를 쪼개 아기새 마냥 받아먹었다. 밤도 아니고 호박도 아닌 애매한 것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마을회관에 자리 잡고 있는 어르신들은 고구마에 김치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여 드시고 있었다.


“순자네 막걸리가 보약이여.”


얼떨결에 건네받은 한 잔, 여산에 청년이 왔다며 건배사를 하시는 이장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잔을 들이켰다. 입안에 퍼지는 달큼함과꿀벌이 왔다간 듯 톡 쏘는 것이 서너 잔 더 받아먹으면, 이곳이 안방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3

좋은 취기다. 들이키고 뱉을 때마다 풍기는 향이 마을회관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 마음이 놓이는데, 이따금 이런 시끌벅적함을 찾을 때가 있다. 부족한 공감대는 눈 맞춤과 웃음으로 채워갔다. 그들의 소리가 한데 모여 멜로디로 들려온다. 흘러들어오는 멜로디에 나를 맡겨보기도 했다. 몸은 같은 곳에 있지만 나는 다른 곳에 있다. 아, 얼마만인가 온기에 둘러싸여 평온함을 느끼는 것이. 맑은 것 사이에 있으니 나 또한 그런 사람인 양 굴어본다.


마을 한 바퀴 돌아 그리운 파란 대문 앞에 서면, 풍기던 향을 더 그리워할 것이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굳게 닫힌 문을 열지 말까.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마을회관에서 돌아와 파란 대문 앞에 섰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순간, 따뜻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까 봐.


정말 꿈이었을까.


가로등 필라멘트가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내 분신을 만들었다. 잠시 눈 좀 붙이자. 오래 잠들면 누군가 깨워줄 것이 틀림없으니.


익숙한 향기가 난다. 할머니일까. 누군가 내 앞에 온 것이 틀림없다. 익숙한 향에 나는 그 존재를 할머니라 단정 지었다. 분명 할머니가 틀림없다.


“아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응. 할매 기다렸지.’


내 어깨를 감싸왔다. 온기가 번져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지는 듯하다. 눈을 뜨니 순자 아주머니였다. 가로등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부리나케 달려왔다며, 이곳에서 왜 잠들었냐 물으셨다. 입을 떼어 전해야 하는데, 한 움큼 집어넣은 얼음 가루를 먹은 듯 골이 띵했다.


나는 어떻게 굳게 닫힌 파란 대문을 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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