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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18. 2022

기쁨의 성당_EP2

댄싱 처치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여행자에게 좋은 옷이라 해봤자 구멍 나지 않은 깔끔한 윗도리와 긴 치마 정도였다. 성당 안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을 뿐 아니라 의자 사이로 염소들도 쉬고 있었다. 바닥에 똥을 한바탕 싸질러 놓았지만 안중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들은 주로 새 하얀 옷이나 아주 파란 원피스를 입고 두건을 둘렀다. 내가 알던 레이스 면사포가 아닌 보자기 같은 천으로 된 두건이었다. 남자들도 단정한 차림을 위해 애를 쓴 것이 보였다. 아이들은 형형색색 드레스를 입긴 했는데 꼭 한 두 군데씩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 있었다. 어른들은 우리를 힐끔 쳐다보고 앉을자리로 향했지만 아이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우릴 쳐다봤다. 개중에 용감한 아이들은 우리 옆으로 와 손을 만져보기도 하고 무릎 위에 털썩 앉기도 한다. 하지만 성당이라 엄숙해야 하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는 듯 소란을 피우지도 떠들지도 않고 또래 아이들과 소곤소곤 말을 했다. 우리에 대해 긴히 토론할 말이 있는지 손가락으로 우리 몸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곧이어 미사를 진행하기 위해 케빈 신부님과 사제들이 들어왔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아닌 경쾌한 디지털 피아노와 드럼, 일렉기타 합주가 모두를 들썩거리게 했다. 녹색과 흰색이 섞인 신부님 옷을 입고 방망이에 성수를 묻혀 휘두르며 입장했다.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음악은 점점 더 높아진다. 케빈 신부님 뒤로는 어린아이부터 다 큰 청소년들까지 리드미컬한 춤을 추며 따라 들어갔다. 성당에서 춤이라니??


나는 열 살이 될 무렵 세례를 받았다. 할머니를 따라 성당을 다니던 중 여자들이 쓴 하얀 면사포가 예뻐 어린 마음에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 결심했다. 한국이나 유럽의 성당은 조용하고 성스런 분위기에 압도되는 엄숙함이 있는데 이곳은 전혀 달랐다. 목청을 울리며 ‘아야야 야야 야’ 내지르는 소리는 세렝게티의 초원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눈이 휘둥그레 져 놓치기 싫은 이 순간을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니 사람들은 우리가 우스운지 깔깔대며 박수를 쳤다. 춤추던 사람들은 부끄러운 듯 내 시선을 피했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연예인처럼 으스대기도 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로 리드미컬하게 몸을 흔들었는데 몸치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실내였는데도 케냐의 초원의 한 부족이 된 뷘위기였다. 성당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이들의 ‘춤’ 문화는 우리가 케냐를 기억하는 한 장면이다. 신부님이 말하길 주변국인 탄자니아나 잠비아만 해도 흥겹게 미사를 보는 모습은 드물 것이라 자신했다. 그곳의 성당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긴 해도 이런 흥을 쉽게 보긴 힘들 것이었다. 케냐그냥 성당이 아니라 일명 ‘댄싱 처치’라고 불린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춤을 추는 이유는 뭐예요? 처음 봤어요. 한국의 성당에서는 춤을 추지 않거든요”

“우리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쁘니까요, 우린 춤을 추면 즐겁고 기뻐요. 우리의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같이 나누는 거예요”


춤이 계속되는 와중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과 마을 청년들이 머리에 계란을 이고, 염소를 끌고, 닭을 품에 안고, 과일을 들고, 포대자루를 둘러 매고 성당으로 들어왔다. 긴 행렬이었다. 이 또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헌금을 따로 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성당에 보내는 물품이기도 했다. 난생처음 보는 생경한 미사에 우린 입이 떡 벌어진다. 이 모든 의식을 마시고서야 겨우 미사가 시작된다.

2시간이 넘게 길어진 신부님의 말씀을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니 옆자리의 아이들의 꼬불꼬불한 머리만 매만졌다. 미사는 언제 끝나려는지 지겨움에 몸부림을 치던 때, 사방이 조용해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릴 쳐다본다.

“엘리, 숀. 앞으로 나와주세요”

예정에 없던 신부님의 부름에 우린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나간다. 그는 마이크를 나에게 건네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 달라 했다. 작은 섬마을이니 이런 신고식이 필요한 것 같았다. 사람들을 바라봤다. 성당의 2층까지 사람들로 꽉 찬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분, 한국에서 우리를 보러 온 숀과 엘리예요. 두 사람은 여행자입니다. 잠시 우리 성당에서 함께 생활할 거예요. 엘리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 주세요.”

 “우리오마베르(안녕하세요: 루오어), 저희는 한국에서 왔고,, 부부예요. 내 이름은 엘리, 남편 이름은 숀이에요. 2주 동안 이곳에서 신부님 일을 도우며 생활할 거예요. 우리를 보면 인사해줘요.”

하얀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 사람들을 환영의 박수를 보내줬다. 우린 자리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는 끝이 났다. 자리에 일어나 성당을 나오는 내내 마을 사람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우리 이름을 부르며 친구를 맞이하듯 손을 잡았다. 수많은 이름을 들었지만 몇십 명의 얼굴과 이름이 뒤섞여 그들과 헤어지는 동시에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음팡가노는 케냐에 살고 있는 많은 부족들 중 루오족이 사는 섬이었다. 영어와 루오어, 키스와힐리어를 섞어가며 말을 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행히 젊은이들 대부분은 유창하게 영어를 했다. 영국의 식민지를 겪은 후 학교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오니 부엌 바닥에는 물이 높이 쌓여 곳간이 가득 찬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생수나 콜라와 같은 마실거리는 마음에 들었지만 닭과 염소는 난감한 선물이었다. 우리에게 주는 선물도 아닌데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봤는데 이내 신부님과 사제들은 물건을 다시 가지고 나가더니 필요한 사람에게 배분하기 시작했다. 부자가 된 기분이 되자마자 곳간은 곧 비었다. 당장 먹을 수 있는 식빵과 과자들은 어르신들과 아이들에게 돌아갔고, 설탕과 곡물들은 몇몇 신도에게 나누어 주었다. 염소와 닭도 다른 집으로 보내어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냄비에 담긴 닭 요리가 다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점심상에 올라왔다. 섬사람들에게 이 성당은 단순히 미사를 보고 주말을 보내는 곳이 아니라 나누는 곳 그 자체였다. 가진 사람은 더 내어놓았고 부족한 사람은 기뻐하며 그것을 취했다. 예수님의 밀가루 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그것을 내었고,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었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음팡가노 섬에서 직접 확인하는 셈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일요일이었다.



신부님과 우리의 계약에 대해 이야기 했다. 2주동안 매일 오전 시간에 학교의 영유아 반 아이들을 위해 옥수수죽, 일명 포리지를 만들고 배식하면 된다. 곧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학교가 개학하기 전 까지는 성당에서 영유아 아이들의 식사를 만들면 된다. 일이 생길 때 까지는 아이들과 지치지 않고 놀아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케냐에는 수 많은 부족이 있는데 고유의 말과 문화가 따로 있다. 유명한 마사이족도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쳐 살고 있는 종족 중 하나이다. 케냐에서는 영어와 키스와힐리어를 주로 쓰지만 각각의 민족들은 자기네 말을 더 편하게 쓰고 있다. 루오족 아이들은 영어를 곧잘 했다. 학교를 가면서부터 영어를 조금씩 배우다가 고학년들은 영어로 수업을 한다고 하니 나나 남편보다 영어를 더 잘했다.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해결되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수월했다. 이곳에 온 첫날에 우리를 보며 쭈뼜대던 아이들도 이제는 우리 얼굴이 익숙한지 곁을 떠날 줄을 모른다. 살을 주물럭거렸다 쓰다듬었다 하느라 모두들 눈과 손이 바빴다. 특히나 머리가 긴 남편을 두고는

“지져스~”를 외쳐대며 머리를 수 십갈래로 땋아 놓았다. 성당 벽에 걸린 예수님의 그림과는 누가 봐도 달랐지만 아이들은 본인들 보다 조금 밝은 피부색과 긴 생머리를 가진 남편이 백인의 예수님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순수한 발상이 사랑스러웠다.  

곧이어 한 하이는 남편의 두피가 하얀 것을 보고는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거봐 이거봐 머리카락 속 피부도 하얗다!”

라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인 양 소리를 친다.  나머지 아이들도 덩달아 놀람을 금치못하고 길상이의 머리속을 다 뒤집어 놓는다. 머리카락 속 구석구석을 뒤져서라도 까만 피부를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여자아이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의 느낌이 부드러운지 작은 탄성과 함께 인형을 다루듯 소중하게 만진다. 우리가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한참을 웃었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웃는 입 안으로 금니를 발견하고는

“입 안에 금이 있어!!!”

라며 이젠 입을 벌려보라고 한다. 아이들 눈에는 모든 것이 이슈거리다. 끝날줄 모르는 이들의 탐색전에 별 것 없이 마네킹처럼만 있어도 세상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루오어로 속닥속닥일때마다 우리가 알아들을까봐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이들의 호기심을 다 채워주다가는 하루 만에 몸살이 날 것 같았다. 일을 해보기도 전에 마네킹 놀이를 하다가 나가떨어지게 생겼다.

우린 궁금했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떠오르는 것은 코가 흐르고 산만한 배가 나와 우는 아이들이었는데 그런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곳 아이들은 생각했던 것 보다 멀끔했다. 성당에 오는 날 만큼은 더 예쁘게 하고 온다고 하니 낡고 찢어진 옷이긴 했어도 나름 최선을 다해 멋을 내고 온 것이다. 우린 ‘아프리카’에 대해 얼마나 무지 했는지 깨닫는다. 케냐, 에티오피아, 탄자니아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었다.

 케냐는 그나마 상황이 좋은 아프리카의 나라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섬에 봉사자를 많이 모집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곳의 무엇이 문제인지 신부님께 들어보기로 했다. 이 섬의 아이들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도움이 필요한 걸까?

저녁시간이 되기 전 우린 식탁에 사제들과 모여 앉았다. 케빈 신부님은 우리보다 한살 많은 나이었지만 훨씬 더 어른 같이 성숙해 보였다. 그가 조근조근 내 뱉는 말들에는 무게가 있었고 기품이 넘쳤다.


“이 섬에 대해 말해 줄게요. 난 2년 전부터 여기로 발령 받아 근무하고 있죠. 이곳 주민 대부분이  빅토리아 호수에서 나일파치를 잡아 내다 팔며 살아가요. 이곳 남자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 밖에 모르죠. 일자리가 많지 않은 케냐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여기서 고기를 잡으면 끼니 걱정은 안 할 수 있어요. 외지에서도 일을 하겠다고 이 섬으로 종종 들어와요. 마을 여자들은 이 남자들과 동거를 하거나 매춘을 하기도 하는데 남자들은 돈을 벌고 곧 떠나요. 결국에 이 마을에 남는 건 아이들과 여자들이죠. 아무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거죠. 여자들도 아이를 할머니한테 맡기고 뭍으로 떠나기도 해요. 이들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성당이나 교회, 구호단체들 밖에 없어요.
제가 처음 여기 발령을 받아 왔을 때 성당 마당 옆 길에 한 아이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 길을 지나 학교에 가던 도중 쓰러진 것 같았어요. 이른 아침이라 아이를 데리고 일단 성당으로 데려 왔는데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었어요. 일단 포리지를 끓여 먹였더니 정신을 차리더라구요. 아이를 데리고 학교로 갔어요. 선생님께 아침에 일어난 일을 말했더니 이런 아이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나도 어려서 아주 가난하게 자랐어요. 하루 한끼 겨우 옥수수죽을 먹고 잠드는 시절이 있었어요. 난 그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알아요. 너무나도. 울고 싶어도 울 힘도 없어요. 그냥 쓰러지는 거예요. 그 날부터 학교의 유아반 아이들에게 점심 한끼를 주고있어요. 성당 뒷편 언덕에 작은 공터가 있는데 3-6살 아이들에게 포리지를 만들어 먹이는 일을 해요. 그런데 그 일을 지금 선생님이 하고 있어요. 성당에서 돈을 조금 드리고 학교와 상의해서 하게 된 일이죠. 봉사자가 있으면 그 돈을 아껴서 식품을 더 살수 있으니 워크어웨이로 봉사자를 모집해 보자 한거예요. 그리고 그 첫 지원자가 숀과 엘리에요. “

섬에 아이들과 여자가 넘쳐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정부나 도움을 주는 NGO단체는 없나요?”

“정부에서 이 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지는 5년도 채 안되었어요. 그 전에는 거의 버려진 섬 같았고고요. 정부에서 뭘 해주길 바라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예전에 이곳에는 병원도 었어요. 하지만 정부도, 도움을 주는 단체도 떠나버렸어요. 이 큰 섬에 유일한 병원이었는데 지금은 먼지와 벌레들만 가득해요. 꾸준히 우리를 도와줄 단체를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예요. 이 섬에는 말라리아나 에이즈가 아주 흔한 병이죠. 그런데 병원도 약도 없어요. 성당의 수녀님들은 그 병원을 다시 열기 위해서 세계 곳곳에 도움을 청하고 있어요. 아직 답을 받은 곳은 없지만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앞이 캄캄하다. 배에서 내려 이 섬을 처음 봤을 때 활기찬 여자들과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로 낙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부님의 말을 듣고 나니 삽시간에 슬픈광경이 되어 머리속을 스친다.

 “몰타 친구가 가끔 아이들 입을 옷과 신발을 보내줘요. 그리고 돈도 가끔 후원해 주기도 해요. 천주교 교구에서 나오는 돈은 너무 적기 때문에 성당 살림을 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곡물 같은 것을 사기엔 좀 빠듯해요. 가끔 이런 후원이 오는게 참 다행이에요”

일단은 이틀남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내일 낮에 80인분정도의 포리지와 도넛을 만드는 일이 있으니 청년부 아이들에게 일을 잘 배워두라 한다. 옥수수 죽 한그릇과 도넛을 먹이는 일이 우리의 본격적인 첫 일이었다. 긴 이야기 끝에 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무거워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우리 방이 워낙 덥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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