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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ul 16. 2024

작정하고 생필품 비우기

마감이 주는 힘에 관하여

요즘같이 집안 생필품 재고에 바짝 촉을 세우며 지냈던 날들이 있었던가 싶다. 출국을 한 달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부쩍 욕실 용품, 세제류, 요리용 갖은양념 소진에 열을 내고 있다.



세탁 세제가 동난 뒤로는 남아도는 몸 세정제로 옷을 빤다. 과탄산소다에 얼마간 담가둔 세탁물에 바디워시와 손세정제를 푸는 식이다. 거기에 세숫비누를 녹여 부어주면 비누도 소진하고 옷에 향기도 더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바디워시나 세숫비누 같은 몸 세정제는 약염기성이라 약산성을 띄는 세탁세제에 비해 세정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어떤 세제나 기본적으로 계면활성제를 품고 있는데다 매일의 빨래란 게 큰 오염 없이 땀을 제거하는 수준일 때가 많으니 큰 문제는 없다 본다.   



식기세척기용 주방세제는 꼭 식세기에 넣어 써야만 하는 줄 알던, 그렇게나 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샘플이라기엔 용량이 제법 되는 세제가 여러 개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차피 설거지용 세제인데 그게 그거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 즉시 주방세제 용기에 식기세척기용 세제를 채워 쓰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양을 수세미에 묻혔는데 거품도 풍성하고 그릇이 유달리 뽀득하게 닦이는 건 기분 탓인지, 확연한 세정력 차이인지 잘 모르겠다.





다 쓴 치약의 배를 갈라 욕실 청소를 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청소용 칫솔에 남은 치약을 묻혀 타일 줄눈을 닦으면 웬만한 오염과 곰팡이때는 다 제거된다. 아직 한참 남은 구연산을 소진하는 일도 요즘 주력하는 일 중 하나다. 덕분에 화장실 청소 횟수만 늘었다. 누구라도 집을 보겠다고(아직 집이 안 빠져나간 상황이라)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는 시기에 차라리 잘 된 일 같기도 하다.



주방에서는 똑 떨어진 진간장을 대신해 조선간장이 흑기사로 나섰다. 조리에 진간장이 필요할 땐 조선간장을 약간 적은 듯이 풀고 설탕을 살짝 더해 맛을 낸다. 멸치액젓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몸통에 새겨진 유통기한이 2021년 9월인 걸 보면 이 한 병을 참 오래 두고 썼다. 이참에 비워내고 싶어 미역국을 한 솥 끓이고 부러 오이소박이도 담갔다. 비워진 병에 물을 조금 붓고 쌀쌀 흔들어 미역국에 마저 부으니 젓갈에 찌들었던 병이 개운하게 비워진다.



화장실에 볼 일을 보러 들어간 아이가 '엄마'를 다급히 불렀다. 아차, 두루마리 화장지가 애매한 시점에 동이 났구나. 이제와 한 세트에 12 롤, 30 롤 하는 휴지를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서야 베란다에 차곡차곡 모아둔 생수 테트라팩이 떠올랐다. 생협 매장에 가져가면 20팩 당 두루마리 한 롤을 준다고 했던가. 냉큼 달려가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소용될 두루마리 휴지 몇 롤을 받아오는 것이 무엇보다 과제임을 직감했다.



마감은 창의를 부르고 몸속 '부지런함'의 세포를 일깨운다. 살림을 살며 스스로 갇혀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전에 없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샴푸와 바디워시 , 간장병과 멸치액젓통이 하나씩 비워질 때마다 야릇한 희열에 사로잡힌다. 소비 없이 비우는 일에 몰두하면서 작은 살림이 주는 기쁨을 누린다.



내일은 어떤 통을 비워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또 한 가지 통을 비워내다 보면 주방에, 세탁실에, 주방에 서는 주부의 몸과 마음도 함께 가벼워질까? 살림을 살아내느라 무거워진 모든 짐을 툴툴 벗어버리고 비로소 미련 없이 이곳을 뜰 수 있게 될까? 갈수록 시한부 살림의 말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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