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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Nov 07. 2020

내 그릇

당신과 나의 보통의 날들

내 그릇


즐겨 찾는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주문할 때면 커피의 종류와 함께 으레 알맞은 컵을 정해줘야 한다. 톨(tall)이니 그란데(grande)니 온즈(onze)니 하는 영어를 보며 컵의 용량 내지 사이즈를 결정해주면 바리스타가 그에 맞게 음료를 제조하여 내어 준다. 처음에는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귀찮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지금도 온즈(onze)라는 용량은 내게 생소하여 가늠이 힘들다. 차라리 개인의 선택 없이 메뉴판의 커피 종류만 정해주면 적당히 알맞은 꽃 그림이 그려진 커피 잔에 일괄적으로 제공해주던 커피숍이 그립기도 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담기는 음식물의 양은 크기에 비례하는 적이 많다. 큰 그릇에는 많은 양이, 작은 그릇에는 적은 양이 담긴다. 소위 사람은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소심한 사람에게 그릇이 작다며 혀를 끌끌 차는 비유도 보았다. 그릇이 크고 넓으면 많은 양을 담을 수 있기에, 대범하고 좋은 거라고 사람도 그렇게 비유되었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릇을 키우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데 크고 넓은 그릇이 과연 늘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각종 양념이나 장류는 작은 종지에 소담히 담는 것이 쓸모없는 낭비도 막고 적절한 양을 먹게 되어 알맞다. 간장을 커다란 넓은 접시에 가득 낸다면 그야말로 이솝 우화 ‘학과 여우’ 꼴이 아니겠는가. 각자의 알맞은 그릇에 제 역할을 하도록 담은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자꾸 그릇을 키우고 싶어 한다. 나는 다 마시지도 못하는 음료를 제일 큰 컵에 담아 하루 종일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고 짐처럼 들고 다니느라 귀찮고 힘들었던 적이 있다.  무작정 큰 게  좋은 줄 알고 제일 큰 사이즈를 시켰다가 반나절 내지 하루 종일 음료컵을 들고 다녔다. 나의 위장 사이즈를 고려하지 않은 탓이었다. 욕심이 과했던 것이다. 식은 커피는 맛이 급격히 떨어지기에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마실 수 있는 용량의 커피만 시켜서 따뜻할 때 다 마셨으면 딱 좋았을 것이다.  누구든 적절한 자신만의 그릇을 찾아 자신을 예쁘게 담아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릇에도 빈부 귀천이 있을쏘냐 싶지만 안타깝게도 있었다. 물건을 사면 끼워넣기 내지 사은품으로 받은 플라스틱 통들은 더욱 그랬다.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받았다. 그릇이 탐이 나 집어 든 적도 있음에도 집에 오면 딱히 쓸모가 없기도 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짐에도 쇼핑 앞에서는 늘 감정과 논리 없는 합리화에 지고 만다.  늘 사던 시리얼이 아닌 홍보차 플라스틱 그릇이 덤으로 붙어 있는 시리얼을 집어 드는 것은 나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그릇을 정리하면서 나는 가장 먼저 플라스틱 그릇을 버렸다. 편리하기는 하지만 간직하고 싶은 그릇이 아니었다. 아무리 크고 좋아도 흠집이 쉽게 많이 났으며 몇 년 사용하니 광택을 잃고 뿌예지기까지 한 플라스틱 그릇은 좁은 주방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그릇일 뿐이었다. 플라스틱은 싸고 가볍고 흔하지만 그렇기에 가치가 떨어졌다. 반면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커피잔과 유용한 그릇들은 남겨 두었다. 깨지면 한 없이 아쉬워할 그런 그릇들도 있었다.


신혼 때 깨지지 않는다는 미학을 담은 브랜드의 식기 세트를 샀더니 이미 문양에 질렸는데도 깨지지도 않고 너무나 멀쩡한지라 여전히 쓰고 있다. 속으로 제발 좀 도자기처럼 이가 좀 나가거나 깨졌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 이 생에는 다시 이 브랜드를 사지 않을 것 같다. 이미 나와는 정이 들대로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구성이 이토록 강한데 이 브랜드가 망하지 않는 게 신기하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꽤 비싼 명품 그릇도 아닌데 마치 끈질기게 살아남은 그릇계의 들풀 같다. 혼수였기에 이만큼 애정하고 쓰는 것인데 시간이 흐른 후에도 차마 정들어 떠나보내지 못하는 건 아닌지 지레 걱정이다. 그릇도 오래 쓰니 정이 들고야 만다.


나는 저녁 식사 시 예쁜 그릇을 꺼내어 사용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그릇도 소중하고 예쁜 것을 골라 꺼낸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제일 보기 좋은 그릇에 반찬을 담고 밥을 내는 것도 이와 같다.  하물며 커피 한 잔을 내어도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예쁘고 좋은 컵에 대접한다. 알맞은 그릇을 찾아내어 정성스레 지은 식사를 담아내어 대접하는 것은 손님을 위한 마음의 표현이다.


작은 접시나 찻잔이라도 쓸모에 맞고 색과 모양이 멋있고 고상하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일 게다. 박물관에 가면 유리 전시관 속에 전시되어 있는 고려청자 도자기나 백자처럼 말이다. 작지만 쓰임에 맞는 그런 알맞은 그릇이 되어야지 크기와 용량만 키우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내실을 다지고 탄탄한 깊이를 가진 그런 그릇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내가 가진 그릇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 애쓰다 보면 그릇이 깨지고야 만다. 아이들 또한 그러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한다. 타고난 그릇을 잘 갈고닦아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이쁘고 소중한 그릇들을 반질반질 잘 닦아 차곡차곡 올려놓았다. 나의 그릇들은 내 식탁에서 가족들과의 식사와 손님 접대를 함께 하며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내어 주는 나의 든든한 반려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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