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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우 Oct 27. 2024

약속

중편 소설 ≪하늘을 사랑한 소녀≫

10.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열세 살이 되었고 수상에 있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꽤 먼 곳까지 배를 타고 나가야 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학교에 늦게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뛰어난 소질이 있다며 칭찬했다.
 “리버, 이건 원래 무슨 색이었어?”
 친구 하나가 목걸이를 보고 물었다. 목걸이는 점점 빛을 잃어갔다. 푸른빛을 반짝이던 큐빅은 태양을 마주해도 탁한 빛만 뱉어냈다. 하지만 내 눈엔 스카이와 함께 보았던 영롱한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애가 잘 도착해서 꽤 멋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믿어졌다.

 열네 살의 어느 날, 잘 돌아가던 선풍기가 멈추었다. 선풍기의 팬을 바꿔야겠다는 엄마의 말에 피엑 이모네에 찾아갔다. 이모는 골라보라며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곤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버렸다.
 나는 순간 데자뷰를 느꼈다. 작은 문이 있을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닥에 내 것이 아닌 그림자가 져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길라스(g̱ila’s).”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와락 소리를 지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끌끌 웃었다.
 “걱정 말아라, 피엑은 내가 멀리 보냈으니.”
 역시 그의 특별한 힘은 주변 상황도 조작할 수 있는 게 맞았다. 그가 이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어요. 지난번에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고요.”
 “내 이름은 ‘마크왈라(‘ma̱kwa̱la)’란다. ‘달’이라는 뜻이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듯 익숙한 단어였다.
 “그럼, 마크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물론이지.”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해주마. ‘이키(ik̓i)’는 나와 함께 있어. 내가 그 애를 불렀고, 그 애가 나를 찾아왔지.”
 이키. 그 애의 이름에 심장이 거세게 반응했다. 그 애가 만나러 간 게 할아버지라는 사실도, 그 애가 할아버지를 만났다는 것도 놀라웠다.
 “네게는 미안하지만, 신에게 받은 능력을 단련하는 시간은 중요하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어린아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가 잘 지내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선풍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되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길어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못 알아보겠다고 말하곤 했다.
 반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스카이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달빛을 반짝이는 까만 수면의 눈과 연한 머리칼을 제외하곤 기억 속에서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애와 남겨둔 사진 한 장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맘쯤 뺏 아저씨가 집을 정리하다 발견했다고 건네준 사진이 아니었으면 나는 모든 게 환상이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속 스카이는 배를 고치다가 찍힌 건지 커다란 배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애의 뒤로 붉은 별 두 개가 그려진 기둥도 있었다.
 그때다. 그 애를 처음 맹그로브 숲에서 만났을 때쯤인 것 같았다.
 나는 그날 그 애가 보고 싶어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던 것 같다. 그 애가 잘 지내고 있는지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4월의 맹그로브 숲은 반가웠다.
 “리버, 멀리 가지 말고.”
 엄마와 아빠는 젓던 노를 멈추고 나를 숲의 초입에 내려주었다. 나는 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시원한 물이 가슴까지 감겨들었고 엄마와 아빠는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갔다.
 새들이 지저귀며 가끔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고요한 물살 가르는 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홀린 듯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양팔로 물을 헤치며 점점 빠른 속도로. 물속에선 뛸 수 없다는 게 답답했지만 첨벙이는 소리를 내며 그곳을 향해 있는 힘껏 다가갔다.
 그 순간 첨벙 소리와 함께 나무 한 그루가 튀어 올랐다.
 “리버.”
 그 애의 까만 눈이 달빛을 반사한 강물처럼 반짝였다.
 그 애가 돌아왔다. 이곳 톤레사프 호로.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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