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소설 ≪하늘을 사랑한 소녀≫
02.
시간은 빠르게 지나 한 달이 훌쩍 가버렸다. 맹그로브 숲에서의 일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나는 그 애와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상 시장에 갈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럴 때면 약속한 시각에 뺏 아저씨네로 가서 쪽배가 아닌 뺏 아저씨의 배를 탔다.
그 배는 아저씨가 여러 명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한 배였다. 두 쪽배를 양 끝에 놓고 그 위를 단단한 판자들로 채워 면적을 넓혔고, 사람 열 명과 오토바이 너덧 대를 너끈히 태웠다. 빈 곳엔 무거운 짐도 둘 수 있었다. 동력기가 설치된 후미에는 여섯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판자를 고정해 지붕을 만들어냈다. 지붕 위를 덮은 방수천이 너덜거리긴 했어도 전반적으로 견고한 편이었다. 지붕 아래에는 나무 상자로 만든 긴 벤치와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 두 개까지 놓여있었다.
엄마는 나를 뺏 아저씨네 배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곤 내가 땅을 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타이어 접착제와 고무테이프, 커튼 천 세 마, 네가 먹을 간식. 쌀 파는 아주머니랑 같이 다니는 거 잊지 말고.”
커튼 천은 나가는 김에 사오는 것이었지만, 물 위로 집을 받치고 있는 타이어에 문제가 생겨 보수할 재료가 필요했다. 원래라면 혼자 다녀왔을 엄마는 잡아 놓은 물고기들을 팔아야해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했다. 아빠가 하던 일이었다.
엄마는 미안한 얼굴 반, 걱정하는 얼굴 반으로 돌아섰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멀어지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멈추더니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명 정도가 뺏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아는 얼굴도 있어서 인사를 하다 보니 누군가 아저씨네 집에서 나왔다. 호리호리한 것이 덩치 큰 뺏 아저씨가 아니었다.
“뺏은?”
“아저씨는 안에서 다른 일 하세요. 오늘 배는 제가 몰아요.”
스카이였다. 그 애는 군더더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대답을 하고는 어디선가 긴 나무판자를 가져와 배와 땅이 연결되도록 내려놓았다.
“배가 파손되었다고 운행 안 하더니, 고친 거니?”
과일 파는 아저씨가 스카이에게 물었다.
“네, 문제없어요.”
스카이의 대답에도 그의 얼굴에서 의심의 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스카이가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마을에 얼굴을 비춘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배를 몰 줄 알아? 길은 알고?”
과일 아저씨의 물음에 스카이는 배를 살펴보던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럼요.”
그 모습이 꼭 세상의 모든 바다를 항해해 본 선장처럼 보여서….
그 기세 때문인지 아저씨도 어깨를 으쓱이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배에 오른 스카이가 사람들에게 올라오라고 신호하자 과일 파는 아저씨를 포함한 어른들이 차례로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맨 끝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오르려는 순간 눈앞으로 손이 쑤욱 내밀어졌다. 고개를 들자 빛을 머금은 까만 눈이 있었다.
“안녕?”
스카이가 인사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자 스카이가 다시 한번 내민 손을 흔들었다. 나는 스카이의 손을 잡고 급하게 배에 올랐다.
“으응, 안녕.”
작게 인사를 던지고 지붕 아래로 쏙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달음박질치는 탓이었다.
스카이는 능숙한 손길로 말뚝에 둘러놓았던 밧줄을 풀어 배 한편에 던져두었다. 비스듬히 세워두었던 판자를 거둬 배에 올릴 때, 과일 아저씨가 무슨 일이 생기면 돕겠다는 말을 더했다. 스카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바보였다. 하필 도망치듯 앉은 곳이 동력기 옆이었던 것이다. 스카이가 동력기를 켜기 위해 허리를 굽힘과 동시에 내가 벌떡 일어섰다.
“리버, 여기 있어. 밖은 더운 거 알잖니.”
옆에 있던 쌀 파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스카이가 이쪽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배 앞머리로 뛰쳐나왔다.
동력기가 타타타타 따발총같은 소리를 내자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배의 오른편 앞머리에 무릎을 굽히고 있다가 이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버렸다. 꽤 오래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는 시장은 엄마를 따라 딱 두 번 가본 적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 가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곳에 있는 물건에 관심을 가지면 손을 잡아 걸음을 빨리했고, 언제 한 번은 옷을 딱딱하게 차려입고 주변을 돌아다니던 사내를 발견하곤 그를 피해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아빠에게 말하자 아빠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되도록 꼭 필요한 것만 사서 빨리 돌아오도록 해. 거기 오래 있어 봐야 괜한 시비를 당하기 딱 좋아서 그렇단다. 놈들이 내놓으라는 신분증이 우린 없거든. 운이 없으면 빠져나오기 위해 저녁용으로 산 생닭을 내주고 와야 할 수도 있어.’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눈을 부릅뜨며 내 앞에서 그런 말 말라고 아빠의 입을 단속시켰다.
그곳에 신기한 게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저 멀리 하늘과 강이 절반으로 맞닿은 수평선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지상에선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맹그로브 숲 역시 지상에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땅이 가진 건 다양한 물건과 넓은 시장뿐이지 않은가?
나는 배의 오른쪽 끝으로 가 허리를 숙여 빛을 번쩍이는 황톳빛 물에 손을 담갔다. 시원했지만 손에 닿는 물살이 세서 금방 손을 거둬야 했다. 전에 뺏 아저씨가 몰았을 때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앞으로 헝클어져 나온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었다. 다시 눈을 뜨자 태양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흘끔 스카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스카이는 기둥 하나를 붙잡고 어른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할까?
나는 괜스레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바닥을 긁었다. 음식을 갉아 먹는 쥐처럼. 그냥 지붕 아래 앉아 있을 걸 그랬나? 뒤쪽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바닥에 있는 나무판자를 계속 긁어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긁은 부분의 판자가 나뭇결대로 쩍하고 쪼개지더니 잡을 새도 없이 아래로 뚝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바닥은 순식간에 두 손을 펼친 크기의 구멍이 생겨 한 조각만 남겨둔 미완성 퍼즐처럼 보였다.
어떡하지?
뒤에서는 간혹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구멍 아래를 둘러보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조각이 떨어진 곳이 강물이 아니라 오른쪽 판자 바닥을 받치고 있는 쪽배 안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이쪽에 난 구멍으로 물이 새어 들어올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빨리 조각을 찾아 스카이에게 건네주어야 했다. 나는 부서진 곳 근처에 있다가 일을 더 키울까 봐 팔과 엉덩이를 움직여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어두운 구덩이에 슬슬 팔을 밀어넣었다.
스카이에게 조각을 건네면서 배를 부서뜨려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 다음엔 그냥 동력기 옆에 앉아야지. 어른들과 스카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다가 배를 고칠 때 돕겠다고 해야지. 미안하니까 시장에 가서 옥수수를 사서 나눠 먹자고 하면 좋아할까?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쏟아졌다. 상체를 조금 더 숙이자 쪽배의 바닥이 만져졌다. 아직 조각이 손에 걸리진 않았다. 볼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 바닥 이쪽저쪽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순간 팔을 확 빼버리고 싶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 분명 쪽배의 바닥 면이었지만 공만 한 쇠구슬을 던져놓은 듯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그렇다고 물이 만져지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폭풍 치듯 엄청난 회오리가 손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아래로 조금 더 들어갈 수 있었다. 맹그로브 숲에서 그 애를 향해 다가갔던 것처럼 조금만, 조금만 더. 어깨가 걸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까지 팔을 내리고 손날을 세웠다. 그러는 내내 차갑고도 이질적인 바람이 아래팔을 끊어버릴 듯 불어왔다.
그리고 손끝에 수면이 닿은 순간,
“앗!”
나는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물이 묻은 손을 털고, 바람이 닿았던 시린 팔을 매만졌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회오리치듯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오른쪽을 지탱하고 있는 쪽배의 밑바닥엔 구멍이 뚫려있었지만, 쪽배 어디에도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뺏 아저씨의 배는 문제 없이 항해하고 있었다. 마치 배 한 쪽이 공중에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오른쪽 물살을 한 번 내려다보고 왼쪽으로 가서 왼쪽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물살에 비해 오른쪽 물살이 약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스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카이는 무언가를 찾는 듯 동력기 근처 짐 꾸러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스카이가 무언가 했다면 책에 나오는 요정이나 마법사처럼 지팡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조금 안심했던 것 같다. 그 애가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결국 부서진 조각은 찾지 못했다. 스카이에게 조각을 건네면서 배를 부서뜨려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했고, 동력기 옆에 앉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애가 햇빛 가리는 우산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사과할 수는 있었다.
“미안해, 실수로 판자 바닥에 구멍을 냈어. 물이 새어 들어올지도 몰라.”
스카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배는 침몰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 말이 어딘가 불편했지만, 이 이상 현상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배의 구조와 실제 배의 구조가 다를 거라고 결론 내렸다. 뺏 아저씨가 쪽배의 바닥이 부서져 어디 한쪽으로 기울어도 정상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수리를 해놓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됐다.
과일 파는 아저씨가 스카이를 도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배는 오히려 뺏 아저씨가 몰 때보다 더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스카이는 강가에서 배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는 뭐라도 사주겠다는 어른들의 말에 괜찮다고 거절했다.
“찐 옥수수 좋아해?”
그러나 내가 말했을 때는 달랐다.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나는 쌀 파는 아주머니를 따라 시장으로 향했다. 대로를 건너기 전 잠깐 뒤를 보자 스카이가 양손으로 옥수수를 잡고 우걱우걱 먹는 흉내를 냈다. 입을 가린 손 밖으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아가는 배는 무거웠다. 내가 산 심부름거리도 비닐에 꽁꽁 싸여 어른들의 짐과 같이 배 한편에 실렸다. 나는 스카이에게 옥수수가 든 봉투를 건넸다. 고마워. 스카이는 봉투를 받아들어 한쪽 팔에 걸더니 동력기를 작동했다.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주황빛 하늘에 파란 물이 들고 있었다. 금방 해가 질 터였다. 뒤에는 어른들도 많았고, 햇빛도 가라앉아 뒤쪽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앞쪽으로 나와 구멍이 있는 곳은 피하고자 바닥을 살펴보았다.
“아까 다른 판자를 덧대어놨어.”
스카이가 옥수수 봉투를 가지고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배의 중간에 털썩 앉았다. 그 애가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길래 나도 그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하루 종일 뻐근했던 다리가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스카이가 팔에 걸어두었던 봉투에서 옥수수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같이 먹자.”
“나는 아까 먹었는데.”
“하나 더 먹어.”
그렇게 말하니 조금 더 먹고 싶긴 했다.
“반만 나눠줘. 그럼 우리 둘 다 한 개 반씩 먹는 거야.”
“좋아.”
스카이가 반을 뚝 부러뜨려 내게 주고 반은 자신이 쥐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마주치고 아까처럼 우걱우걱 먹었다. 그래서 나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키들거리는 바람에 옥수수 몇 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앉은 자리가 편하고 따뜻했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스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붕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전구 하나를 켜고 다시 돌아왔다.
그 애는 말을 잘 들어주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럼 나는 신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우리 동네는 이렇고, 어디까지는 가도 되고, 어떤 곳엔 되도록 가면 안 되고. 수줍음 많은 아이 병이 사라진 것처럼.
그러다 낮에 시장 부근에서 보았던 한 공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쌀 파는 아주머니를 놓쳐 길을 잘못 들어 도착한 곳이었는데, 사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생각했었다.
스카이에게 이곳에 대해 말해야지. 그 애도 이런 건 본 적 없었을 거야.
말하기도 전부터 긴장이 되어 괜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아까 신기한 곳을 발견했어.”
“신기한 곳?”
스카이가 까만 눈을 반짝였다. 나는 내 눈에 담았던 장면들을 스카이 앞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시장 입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는데… 아, 시장 앞에는 넓은 도로가 있어. 거길 건너면 폐건물이 몰려있는 공간이 나와.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야.”
나는 말을 멈추고 그 애를 힐끔 쳐다봤다. 스카이는 계속 말하라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호에 조금 더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조금 더 들어가다 보면 옅은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커다란 건물이 있어. 건물 아래층은 짙은 녹빛 물이 가득 고여있고 냄새도 심했는데, 그곳을 피해 옆에 있는 철제 계단에 올랐어. 그렇게 큰 건물을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더 위로, 더 위로 올라갔어.” 내가 말했다.
“사실 아주머니가 밑에서 날 찾고 계실 거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어.”
스카이는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너머에 있는 이야기도, 눈앞에 있는 나도. 그렇게 나는 내가 만난 기묘한 공터에 대해서 얘기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본 다른 곳들은 그렇게 신기하지 않았어. 말 그대로 버려져 방치된 것 같았지. 기둥이 까져있고 흙먼지가 가득한 채로 텅 비어 있을 뿐이었어. 나는 그냥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생각이었어.
그런데 중간쯤 갔을까? 어떤 층에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어. 그곳은 군데군데 풀과 나무가 자라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숲의 냄새가 났어.
신기하지 않아? 분명히 땅에서 멀리 떨어졌는데, 그곳만 유일하게 푸른색을 가졌다는 게. 그곳에 있는 어떤 나무는 쓰러진 마네킹을 뿌리로 칭칭 감고 있었어.”
“우와.”
턱을 괸 스카이가 웃었다.
“그런데 사실 그곳보다도 네게 말하려 했던 곳은 옥상에 도착했을 때야. 아, 실은 옥상은 아니고 옥상 바로 아래층이야. 진짜 옥상은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거든.
그곳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어. 난 유리 없이 뻥 뚫린 엄청나게 큰 창틀을 내다봤어. 수많은 건물과 사람, 지상에선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수평선까지 한눈에 다 들어왔어. 내 눈에 그토록 많은 걸 담아본 적은 처음이야.”
하얀 새들이 끼룩거리며 눈앞을 지나가고 구름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눈부신 햇살은 그 모든 걸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전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스카이가 내게 물었다.
“리버, 그곳은 얼마나 높아?”
나는 발 한참 밑에 있던 아찔한 땅바닥과 그와 상반되는 드높은 하늘을 상기했다.
“구름에 손이 닿을 것 같이 높았어. 꼭 네 이름같이.”
“너는 높은 곳이 무섭지 않아?”
그 애는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높은 곳이 무섭던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을 보고 빨리 스카이에게 말해주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높은 곳이 좋았다.
“응, 무섭지 않아.”
스카이는 내 대답에 무슨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하진 않았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묻고 싶었던 말들이 끝없이 나올 것 같아서 시작부터 하지 않았다.
배가 언제 도착할지 몰랐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시장에서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모든 얘기는 이것을 위한 전주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다 먹은 옥수수를 봉투에 집어넣고 물기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심장이 또다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스카이, 우리가 시장에 다녀오는 동안 뭐했어?”
어두운 강 저편을 응시하던 스카이가 아까를 생각해 내는 듯 눈을 위로 굴렸다.
“음, 배를 손보고 나무 밑동에 앉아 배를 지켰지.”
“네가 지키지 않으면 누군가 배를 가져갈까?”
스카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거야.”
“그럼 말이야, 다음엔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내가 말한 곳에.”
배가 한 번 크게 덜컹거렸다. 뒤에 있는 어른들이 일순간 웅성거렸고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배는 다시 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나는 짧은 난리통에 스카이의 대답이 미뤄질까 봐 한 마디를 더 붙였다.
“너도 분명 그곳을 좋아할 거야.”
천천히 꽃이 피듯 스카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이야, 같이 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정박했다. 무거운 짐을 내리던 과일 파는 아저씨가 스카이의 머리를 헝클었다.
“너 배를 아주 잘 모는구나. 뺏한테 배운 거니? 아니다, 아니야. 그렇다기엔 뺏이 가던 길로 가지 않더구나.”
“이쪽 길이 조금 더 가깝고 물살이 세기도 해서요.”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녀 본 것처럼 강을 잘 알고 있구나. 그래도 자칫하다 급류를 만나면 골치 아프니까 항상 조심하도록 해라. 그럼 다음에 또 태워주려무나.”
“예, 아저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과일 파는 아저씨는 내 짐까지 땅에 내려주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내릴 때도 마지막이었다. 마지막까지 안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착 소식을 들은 엄마의 배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내 시선을 따라 마찬가지로 엄마의 배를 확인한 스카이가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 또 보자, 리버.”
“응, 고마워.”
얕은 물살에 흔들리던 배가 진정되자 판자를 딛고 껑충 내려왔다. 스카이는 정리를 하기 위해 전구가 은은한 빛을 밝히는 지붕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카이가 지붕 아래에서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을 때, 그 애 옆 기둥에 그려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큰 별 하나와 그 옆에 붙어있는 작은 별 하나. 내가 아빠 배에 그렸던 두 개의 붉은 별과 모양도 색도 같은 그림이.
내 안에서 이상한 기분이 요동쳤다. 의문과 불안감이 한 데 섞여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스카이, 저 그림은 뭐야?”
내 말에 스카이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듯 기둥에 있는 별 두 개를 손으로 쓸었다.
“아, 내 수호의 증표 같은 거야.”
수호의 증표. 같은 의미로 아빠의 에메랄드색 배에 그려 넣었던 그림은 이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불행의 증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하늘에도 무수히 많은 별이 흩어져있으니, 땅에서도 비슷한 별을 찾는 것쯤이야 우연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회오리 같은 불안감이 점점 커지며 애써 덮어두었던 뚜껑 하나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스카이, 그때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어?”
맹그로브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얘기였다. 스카이는 내가 이름을 알려주기 전에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애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
“뺏 아저씨가 알려줬어.”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챙겨서 엄마의 배로 뛰어갔던 것 같다. 스카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침몰한 아빠의 배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에메랄드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배의 옆 통에는 붉은 별 두 개가 박혀있었다. 붉은 별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머리꼭지부터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배가 떠오르면서 노란색 노의 꺼끌꺼끌한 손잡이와 통발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물속에 잠겨있던 손이 수면을 꿰뚫고 배의 옆 통을 턱 잡았다.
아빠!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목 안에서 맴돌았다. 손, 손목, 팔, 어깨.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의 주인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느릿하지만 조금씩 떠오르면서.
곧 숨이 턱 막혔다. 떠오른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다.
그곳엔 스카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