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오단장 - 요네자와 호노부(북홀릭) ●●●●●●●●○○
각 장면은 무섭게 긴박하지만, 그 속에는 한 조각의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 '리들 스토리'라는 게 있나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열린결말과 비슷한 거 같은데,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열린결말과 리들 스토리는 좀 차이가 있다. 열린결말은 미래를 확정짓지 않을 뿐이지 이야기의 끝은 존재하는데 비해, 리들 스토리는 아예 끝이 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끊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린결말에서는 독자가 어떤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뒷이야기일 뿐이며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바뀌지 않지만, 리들 스토리에서는 독자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는 지에 따라 이야기 자체가 바뀌어버린다. 그리고 요네자와 호노부가 이런 장르적 특징을 기가 막히게 포착해 한 편의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 이 '추상오단장'이다.
. 헌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인공이 다섯 편의 리들 스토리를 따라 수십년 전의 진실을 찾아나간다는 이 소설은 그 설정부터가 책 읽는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헌책방, 소설가, 책 속의 책 등 매력적인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고보면 '빙과'에서도, '인사이트 밀'에서도,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는 책 읽는 사람들의 호승심을 자극하고는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런 부분들이 읽는 이들을 몰입시킨다. 비록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시리즈'나 오사키 고즈에의 '홈즈걸 시리즈'처럼 책과 서점이 정말 좋아서 견딜 수 없다(^^;)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긴 하지만, 조용하지만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는 헌책방을 묘사하는 작가의 글에서는 책과 책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진다. 특히 주인공의 친척으로 두터운 연륜과 지식을 바탕으로 헌책방을 운영하는 코이치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캐릭터라, 다른 이야기에서도 한 번 더 나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 사실 이야기가 거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에서 도대체 어떤 것을 찾아내야 하는지 영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웬만큼 이쪽 장르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결말이 삭제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그럼 그 결말에 함정을 파놨겠군요'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테고, 결말이 없는 이야기와 결말이 몇 개씩 된다면 어떤 류의 함정인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을테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그런 닳고 닳은(^^;) 독자들을 상대로 문제 뒤에 진짜 문제를 숨겨놓았다가 맞춰진 첫 번째 퍼즐조각을 들고 반쯤은 의기양양, 반쯤은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들을 끝까지 애태우고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진짜 문제를 내놓는다. 그러고보면 마치 이 소설은 어린 시절 신문에서 풀던 크로스워드와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크로스워드를 전부 풀고, 특정 위치에 있는 단어들을 모아 진짜 문제를 풀던 그 퍼즐과. 그렇게 제시된 진짜 문제를 보고는 작가의 발상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방법이라니. 이런 방법이라면 먼저 생각해내서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이 무조건 이기는거잖아. :)
. 다만 그 최종답안에 이야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끼워맞춘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발상 자체는 소설가가 아니라 읽는 사람에 불과한 내게도 와. 뺏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대단했고, 문장이나 글을 풀어나가는 솜씨 역시 기존에 읽었던 작품들에 비해 훨씬 좋아서 좀 더 개연성에 중점을 두고 구성을 손봤더라면 손꼽을만한 추리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뭐, 이렇게 아쉬움을 조금씩 남기면서도 항상 그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게 요네자와 호노부의 초기 작품들이었고, 그 과정을 거쳐 지금 같은 훌륭한 작가가 된 것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