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종 Dec 08. 2021

돌아가는 길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32. 돌아가는 길



 고혹스러운 자태로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벗은 몸이 천천히 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한 여자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

 끝내 그녀의 나이를 묻지 못했다. 혹자는 그걸 예의라고도 하지 않던가. 내가 상상할 수 있을 만큼만 어리게 보는 것. 어쩌면 그녀가 원한 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어리게 보아주는 것.

 손을 내밀어 어둠에 가린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다시 연한 살구빛을 띠고 있을 그녀의 볼이 그려졌다. 너무 잦은 키스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해친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그녀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은 뭐할 거예요.”

 “내일 친구 맞이할 준비해야지.”

 “벌써 그렇게 됐나?”

 “낮 비행기로 온대.”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내일 태워다 줄까요?”

 의외로 마음은 평온했다.

 “괜찮아.”

 별수 없이 수긍하는 척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알까. 나를 기억해줄까. 그녀가 나를 기억해주면 좋을 텐데. 나를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 내 바람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바보처럼 매달리기 싫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잘 다녀와요.”

 얼른 베개에 눈을 감추었다. 피곤한 척하기 위해 하품 소리를 냈다. 그녀가 속으면 서운할 것이고 속지 않으면 부끄러울 것이다. 나는 어렸다. 그녀만큼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서울에는 언제 돌아갈 거예요?”

 “이번 달 안에는 갈 거야. 너 때문이 아니야. 너 오기 전에도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덧붙인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지만 확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날 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알아서 집으로 돌아갔을까. 이 정도는 물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숨기고 싶은 그녀의 비밀일까. 그녀가 내어줄 솔직한 대답이 두려웠기에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가서 연락해도 돼요?”

 “당연하지.”

 “누나는 나한테 연락할 거예요?”

 말이 없었다. 나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을 뻗어 그녀를 안은 채 나는 천장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빛을 띤 형광등이 옛 기억처럼 떠올라 있었다. 내게 너무 솔직한 그녀가 미웠다.

 “커튼 걷어도 돼요?”

 “응.”

 어쩌면 대답을 주저하길 바란 사람은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나를 필요로 했다면 좋았을 텐데. 일어나 창가에 섰다. 그리고 커튼을 걷었다.

 이미 밤이었다. 해가 뜰 때쯤 왔는데 또 밤이었다. 자꾸만 밤인 것 같아서 기분이 울적했다. 물끄러미 그녀가 가꾸어온 마당을 보다 혼잣말을 꺼냈다.

 “계속 밤이에요.”

 “우리가 만난 날도 이런 밤이었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겨우 하룻밤 추억으로 남고 싶어서 그녀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의 현재가 되고 싶었다.

 “다시 해안가에 나가볼까? 그날의 분위기도 내고 말이야.”

 “아니에요.”

 말을 끊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일어나 앉아 벽에 등을 기댄 그녀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뒤에서 쏟아진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다. 이곳은 어둡고 그곳은 밝았다. 내게는 그녀가 보이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있을 곳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

 “왜, 기분 나쁜 거 있어?”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다정했다. 방금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으리라.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나는 혼자일 것이다.

 “고마워.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여기서 너를 만난 게 행운처럼 느껴져.”

 내게도 그녀는 행운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조용해진 나를 두고 그녀도 기분이 가라앉은 듯했다. 그녀의 마음이 세세히 읽히는 게 나를 못 견디게 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과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이 낱낱이 떠오르는 게 나를 괴롭힌 것이다. 그녀를 기쁘게도 불행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외롭게 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책임질 수 없었다. 우울증에 빠진 여자를 몇 개월간 섬에 머물게 하며 한가롭게 지내게 할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알아보는 진실한 눈 말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나도 다행이에요. 이 섬에서 누나를 만나서.”

 “난 괜찮을 거야. 왠지 모르겠는데 너를 만난 뒤로 마음이 한결 나아졌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고 말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힘을 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그날 밤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는 정말 괜찮아 보였다.

 돌아가는 길은 혼자일 것이다. 해안가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 우리는 함께였는데, 돌아갈 길은 혼자였다. 나는 빈손이었지만 그녀는 가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돌아갈 곳이 없지만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나는 얻을 것밖에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잃을 것들이 많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것이 느껴졌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그녀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다행이지. 고마워. 섬에서 보낸 몇 개월이 몇 년 전 일 같아. 빨리 여기를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어. 내일 친구가 오면 이 섬을 돌아다닐 거야. 너랑 갔던 폭포에도 가고 네가 다녀온 카페에도 가볼 거야. 이따 거기 주소 좀 알려줘. 예쁜 데가 많다는데 한 곳도 돌아보질 못했어. 너랑 만난 바닷가에도 가볼 거야. 네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되겠지?”

 “당연하죠.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괜찮을지도 모르지. 가까운 친구라 남들한테 말하고 다니진 않을 거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안 그래?”

 그만 가고 싶었다. 그녀의 남은 이야기를 다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건 나 없는 데서나 혼자 하면 좋겠다. 그녀가 나를 배려해주면 좋겠다. 그녀는 내 마음을 모르는 듯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그녀는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다. 내 마음이 어떤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들여보내기 전 현관에서처럼 계속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알았기에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우리는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대화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섬에 오기 전보다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내게는 갈 곳이 없었다.








 다음에서 계속

이전 15화 개구리 죽이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