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가래가 계속 낀다. 병원에 갔지만 의사 선생님의 진단도 명확지 않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오늘은 제발 잠을 잘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열심히 대회 준비를 하고 쉴 틈도 없이 새 학기를 맞이해서 몸은 아팠고, 깨끗이 낫지 않은 몸 상태가 감정상태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역시 체력은 국력이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건강하다.
지난주 목요일 몸살 이후로 일상이 아슬아슬했는데, 오늘은 허리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해야 될 일을 제시간에 마무리하는 하루를 보냈다.
아침엔 새로 설치한 전자칠판과 모니터가 맞지 않아 말썽이고, 전자기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데리고 모처럼 입과 칠판만으로 수업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무탈하게 마무리한 하루다.
교육청에서 마음치유 연수를 무료로 수강하게 해 줬는데 연수 마감을 앞두고 급하게 듣고 있지만 클릭만 하지 않고 오래간만에 열심히 듣고 있다. 연수 덕분인지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아이의 말은 말일뿐이란 걸 3일째 되는 오늘에서야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 내 생각과 달리 말일 뿐인 게 아니라, 본인의 감정을 한껏 실어서 하는 진짜 감정 담뿍 배인 진실의 말일 수도 있다. 말일뿐이란 건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내린 결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뭐가 달라질까? 아이가 본인의 감정을 한껏 실어서 한 말이면 뭐가 어때서라는 생각을 오늘은 하게 된다.
아이가 내뱉은 그 단어가 나란 사람을 대표하는 말이라면, 아이 입장에서는 00 같은 사람이 엄마라고 느꼈으니 한 말일테고, 1퍼센트든 100퍼센트든 내가 그런 면이 있으니까 한 말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내가 엄마이긴 엄마인가 보다. 남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3일 만에 과연 용서가 될까?
결국 부모가 나를 안아줄 최후의 사람이란 걸 모르는 아들이 안타깝다. 더불어 부모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알려주지 못한 어리석고 생각 없는 엄마로서 지내온 흘러간 세월들이 안타깝다.
둘째는 안다. 가족의 소중함을. 엄마의 소중함을.
어제, 그제 둘째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남자아이들의 특성이 워낙 단답형에 과묵형이 많으니 그저 짧은 말을 주고받는 수준이지만.
"00아, 엄마가 죽으면 어떨까?"
"안되지."
"왜 안되는데?"
"엄마니까."
엄마니까.
그저 엄마니까라는 대답이 끝이다.
엄마니까라는 말에는 많은 것을 내포할 것이다.
겨우 4글자 안에 엄마와 아들로서 지내온 14년 세월이 모두 담겨 있다. 엄마가 자기를 챙겨주고 보살펴 준 사람이란 것을 아는 아들이다. 엄마와 자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아는 아들이다. 엄마와 자식은 조건 없이 맺어진 관계라는 것도 아는 아들이다. 엄마는 자기한테 소중하니까 없어지면 안 된다는 말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엄마니까' 한마디에 괜히 눈물이 났다.
그래 자식이니까.
나한테 그런 말을 해도 너는 자식이니까.
내가 키웠고 내가 만들었으니까.
서투른 엄마지만 앞으로도 계속 서툴 수도 있겠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조금은 다듬어진 엄마가 되겠지.
자식이니까.
엄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