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은 추석 지나고 심어 겨울 나고 6월에 수확한다. 6월은 감자를 캐는 시기이기도 하다.
감자는 3월에 심는다. 싹눈이 보이도록 칼로 쪼개 심으면, 캘때 감자의 줄기와 뿌리가 모두 그곳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늘을 뽑는 일은 노동이지만 감자를 캐는 일은 놀이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외갓집에 감자 캐러 가는 날을
기다린다. 외할아버지가 줄기 뽑고 비닐을 걷어내면 아이들이 조심스레 호미질을 한다. 모래 속에 낳아둔 거북알이 모습을 드러내듯 연노란 감자가 올라온다.
아이들이 고랑에다 감자를 모아 놓으면 나는 따라다니며 크기별로 다른 상자에 담는다. 조림용으로 쓸 메추리알 크기, 쪄서 먹을 계란 크기, 요리용으로 보관해 놓을 주먹 크기. 감자를 캐고 점심 먹으로 오는 길에 집 아래 텃밭에서 고추를 땄다. 길게 두 줄로 심어 놓았는데 앞 줄 세 포기가 맵지 않은 아삭고추이고 나머지는 모두 매운고추란다. 아삭고추만 열 개 따고 옆에서 기름하게 자라난 가지도 두 개 땄다. 점심 반찬으로 아삭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생각보다 맵다.
"아삭고추가 제법 맵네요?"
"매운고추 옆에 심어놔서 그래."
장모님의 대답이다.
"식물도 서로 닮나봐요."
"벌이 매운 고추에 수분하고 옆에 아삭고추에 가서 수분하니까 꽃가루가 섞여서 그렇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벌이 아삭고추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다니. 아삭고추의 꽃에 매운 고추의 꽃가루를 옮겨 놓음으로 매운 맛을 갖게
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벌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삭고추에 매운 맛이 가미되면 식감과 풍미를 모두 갖춘 완벽한 고추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
'네 안에 무엇을 넣어줄까 고민하지 말고 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를 관찰하라'는 말이 있다. 아삭고추가 매콤한 풍미를 가지면 더 나은 고추가 될 것이라는 신념은 벌의 주관일뿐이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부모의 주관이며 조직 구성원은 이래야 한다는 리더의 주관일뿐이다.
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는 일이 먼저다.
벌이 강제해 놓은 아삭고추의 매운맛이 반갑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