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에서 찾은 노력 <첫 운전>
첫눈이 왔다. 이미 쌓인 눈도 모자라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보니 왠지 서운했다. 첫눈은 보슬보슬 내리며 그리운 이들을 한 번쯤 떠올리게 하는 로맨틱한 겨울 이벤트라 생각했었는데. 이번 첫눈은 보슬보슬은커녕 마치 그동안 쌓인 감정이라도 있는 듯 눈을 콸콸 쏟아부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겨를 없이 도로상황부터 알아봤다. 이런 상황을 알리 없는 초등생 아들은 밤새 내린 눈을 보며 감탄하며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다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사람들은 왜 눈앞에만
'첫'이라는 말을 붙이는 거야?
첫 비, 첫 태풍, 첫 미세먼지는 없잖아!
처음 내리는 눈이 되게 중요한 건가?
"글쎄.. 엄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아마도 계절을 타는 날씨여서 '첫눈'이라고 하면 겨울의 시작을 알게 되는 느낌이 들어 그런 말을 붙인 게 아닐까?", "그럼 황사는? 황사도 봄철에 나타나는 현상이잖아!", "그런가? 네 생각은 어떤데?" 강의를 하면서 터득한 대처법이었다. 학생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똑같은 질문은 다시 하면 된다.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잠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난히 처음에 관심이 많다. 첫사랑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첫 출근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고, 첫 돌도 화려하게 치른다. 그렇지만 처음 겪는 모든 일에 '첫'을 붙이지는 않는다. 첫 김치찌개나 첫 설거지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 첫 oo'은 일상에 변곡점이 되는 일에 붙는다. 첫눈이 퍼붓고 난 뒤 본격 겨울맞이가 시작되고 첫사랑 뒤엔 누가 나를 때리지 않아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구나라는 아린통증을 알게 된다. 첫 출근을 하고 나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설득력 있는 상황으로 만들어야 하는 부조리한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첫 oo'의 시작은 폭신하고 설렐지 모르나 그 시작된 이후과정은 더럽고 지저분하다.
15년간의 장롱면허를 끝내고 운전대를 잡았다. 3년 전 퇴사와 함께 시작한 도전이었다.
첫 수능, 첫 출근, 첫사랑만큼이나 떨리고 두려웠다. 첫 운전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 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두 시간 전에 출발했었다. 내부순환도로를 처음 진입하는 순간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목 뒤가 쭈뼛섰다. 도로 진입로 바닥에 적힌 '천천히'라는 말에 위안을 받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 “천천히'라고 쓰여있잖아! 근데 왜 다들 나를 추월하냐고!!" 라며 마이크 모양으로 생긴 차량용 방향제와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영화 ‘캐스트 어웨이’ 속 '척놀랜드'와 '윌슨'처럼 섬에 갇혀 서로에게 의지하며 도착지가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도착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진입하는 순간 조수석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며 유리창이 깨졌다. 아니 박살이 났다. 순간 누가 총을 쏜 건가 의심이 들정도로 큰 굉음에 놀랐다 (실제 총성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만큼 큰 충격음이었다) 너무 놀라고 정신이 없어 일단 주차를 하고 상황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차를 했다. 문을 내리자마자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하는 두 남자가 눈에 보였다. 이거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챈 뒤 온몸이 굳었다.
주차장 입구에 설치된 화재 차단 방화벽이 약간 안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못 보고 박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주차장 시설 관리하시는 분은 부서진 방화벽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온 것이다. 나는 상황 파악 못하고 주차하러 갔지만, 그들이 보기엔 시설을 부시고도망친 뺑소니로 오해한 듯했다. 넋이 나간 내 표정과 뒷 창문이 반쯤 가려지는 크기의 초보운전 스티커를 보고 그들은 화가 조금 누그러지신 듯 삿대질한 손은 내려왔고, 목소리 크기도 차츰 정상 데시벨로 돌아왔다. 그 뒤로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있었다. 하지만 운전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운전을 하면서부터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지니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퇴사와 함께 타임 테이블이 달라짐과 동시에 활동영역이 넓어지니 정말 즐겁고 흥분되는 일들이 늘어났다. 운전으로 동선이 짧아져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고, 먼 곳약속에도 큰 부담이 생기지 않으니 마음의 여유로움이 더해졌다. 내게 첫 운전 이후 한 동안 지저분한 구덩이에 빠진 느낌이었지만 구덩이에서 나온 뒤부터는 완전 새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첫 OO'에는 수많은 시련을 안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련을 이겨내면서 생각의 깊이와 사고가 커지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처음'에 관심이 많은 건 상대에 대한 걱정과 응원하는 마음 아닐까? '네가 하는 그 처음은 힘들고 평탄치 만은 않을 거야, 하지만 잘 이겨내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 거야!' 뜻으로 '첫'이라는 구호와 함께 응원해 주는 듯하다. 앞으로도 나의 '첫 OO'이 너무 기대가 된다. 설레고 두려울 땐 첫!이라는 구호와 함께 응원해보고 싶다. 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