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없다. 이렇게 믿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단정 지었다. 이건 멋이나 유행, 남다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희망은 늘 강요의 대상이었고 어색한 구호였으며 어깨와 허리가 맞지 않는 새 옷 같았다. 희망을 믿지 않는 게, 없다고 여기는 게 최후의 선택이었다. 닳고 닳은 몽당연필로 체크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내가 겪은 그동안의 총합을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전제이자 정의였다. 희망이 없다고 단정 지어야 말이 되는 일들 뿐이었다. 애초에 없었으면 그동안 겪고 목격한 일들이 정당성을 얻었다. 희망이 없으므로 말이 되는 일들. 튀어나온 못을 우연히 밟고 괴성을 지르며 희망은 없다고 선언한 것이 아닌 발바닥부터 서서히 젖고 젖어 정수리까지 감겼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희망에 대한 관점을 단정하고 나서야 입장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프레임이 형성되고 거기에 맞추면 말이 되고 예견도 들어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봐, 역시, 희망 같은 건 없잖아. 내외부에서 광풍처럼 불어오는 비극과 고통의 출처를 막는 일이 아니었다. 희망이 없다는 단정은 그 출처가 어디고 무엇이든 입장을 정하는 일이었다. 딛고 서 있는 곳을 지정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변화 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 아닌 그동안 상처 입은 일로부터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벽을 쌓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대부분의 글들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었다. 가장 적게 상처받아야 하는 사람, 바로 내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희망을 믿지 않기로 다짐하고 희망은 없다는 논조의 글을 빈번히 대량 생산하는 것이 습관처럼 고이고 굳어지고 외류의 유입을 막았다.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나아지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글도 특정 사고에 대한 특정 대상을 향해 닿을 수 있는 내용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말은 하고 싶었다. 희망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희망은 없지만 버틸 수 있다고. 희망은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희망은 없지만 나는 있고 우리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걸 믿는다.
*22년 10월 29일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