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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an 23. 2017

아빠 아빠 압빠...

아이의 세계는 모든 것을 잠식한다

번민. 잠잠해진 파도.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은 날이 있었고 그날 이후에 모든 것들의 포말이 소금처럼 바람에 섞여 해변 위에 서있던 사람들의 눈을 비비게 했다. 아무렇지 않다. 발자국은 모래 위의 파도가 휩쓸어 갔고 남은 건 관광객들이 먹다 남긴 햄버거 몇 조각. 콜라. 감자튀김. 고개를 돌렸다. 부정이 아니라 다른 호기를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은 날들이 무료했고 시도해서 거부당하기를 선택했다. 차라리 불안을 씻기엔 이게 나았다. 모두에게 한 번뿐이라는 시간은 누가 지어낸 말 같았다. 그게 뭐든 조급하게 만들 뿐이었다. 불안이 창조 자체로 이어질 순 없었다. 단계들. 약속들. 넘어가고 말아야 할 귀찮음들. 혼자 싸웠다. 혼자와 혼자서. 


변화를 언급하는 건 역시 지루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달라진다고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았다고 스스로 세뇌한 건지 달라지지 않은 건지 실물과 인지의 겪을 따지는 것조차 의미를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몹시 피로가 몰렸다. 생명을 만든 대가. 생명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며 팽창하고 있다. 팔다리를 있는 힘껏 사용하고 땅을 울리며 공간과 공간 사이를 순간 이동했다. 만약의 사고를 막으려 그림자라도 따라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나는 쓰러지고 너는 멀리서 비웃었다. 너에 대한 찬란한 비명을 언젠가 기록으로 남길 거야. 다짐했지만 다짐뿐이었다. 너는 누구에게도 자기 이외에 시간을 쏟지 말라고 명령했다. 나만 보고 내게만 말하고 나만 먹이고 나하고만 놀고 나만 안아주고 내게만 너희의 세상 모두를 가져다 바치길 애원하고 간청하며 화내고 단언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목소리와 눈빛, 뺨과 찡그림으로. 


같이 있는 시간 동안 같은 있는 시간을 제대로 형언할 수 있을까, 없겠지 틈틈이 생각한다. 틈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정신과 힘을 쏟아붓는다. 수백 곡을 노래하고 수백 장의 책을 읽고 수백 컷의 그림과 수백 마리를 흉내내고 수백 번 들어 올려 수백 번 사랑한다 속삭인다. 앙다문 입술 사이를 새처럼 벌릴 때까지 기다리다 쏙 밥을 넣고 만세를 부른다. 그 밥을 지으려 내 첫사랑은 24시간 연구하고 끓이고 졸이고 볶고 비비고 불을 피우다 자신을 모두 잃어버렸다. 아이의 세계는 모든 것을 잠식한다. 아이가 눈을 뜨면 우리의 시간은 같이 일어난다. 내복 바지를 벗기고 젖은 기저귀를 갈고 다시 내복 바지를 입힌다. 동시에 우유를 데운다. 정량을 재고 40초를 데운 후 젖병에 다시 옮겨 먹인다.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우유를 빨아들이는 동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다. 아빠의 다리와 아빠의 옷깃과 아빠의 손가락에 접촉한다. 다 먹으면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린다. 입에서 빼면 아이는 다 먹었다며 박수를 친다. 합의된 신호. 일어나 돌아다닌다. 아직 어둑한 거실. 불을 다 켜지 않는다. 어둠에 익숙한 움직임. 책장을 주욱 훑다가 멈춘다. 한 권을 빼어 들고 가져온다. 읽는다. 아니 영화가 상영된다. 성우가 되어 내레이션을 읽고 배우가 되어 행동과 목소리를 연기한다. 아이의 반응을 살핀다. 반응이 좋으면 이어진다. 또는 다른 책이 주어진다. 


다른 책, 다른 책, 다른 책, 그렇게 거실은 펼쳐진 그림책으로 철철 넘친다.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구르거나 눕거나 어딘가로, 아무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것 같지만 어쨌듯 여기는 아닌 듯한 다른 어딘다고 성큼성큼 옮겨간다. 그곳은 방이거나 거실의 다른 구석이거나 소파 위거나 식탁 밑이거나 너의 아침밥을 준비하는 주방 근처이기도 하다. 새로 산 장난감을 쏟아본다. 그 안의 동물 인형들을 줄 세워본다. 이름을 소개하고 울음소리로 설명해본다. 틈을 내어 물티슈로 바닥과 쇼파위등 아이가 많이 닿는 곳을 닦는다. 아이도 따라 한다. 난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하고 인사하며 문을 나선다. 아이는 신발장에서 멍하니 바라본다. 아빠 아빠 압빠... 매일 아침 아이의 얼굴이 보이는 문틈이 좁아질 때마다 마음 아팠다. 


지상의 모든 불이 꺼지면 집에 돌아온다. 잠들지 않은 아이는 철커덕 문소리와 함께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돌파해 파괴할 듯 소리를 감지한 방향으로 달린다. 하루만큼의 먼지가 쌓인 채 하루만큼의 거리를 돌아온 아빠를 향해 모든 에너지가 담긴 환희를 발사한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흥분을 알린다. 다른 언어를 쓰는 누군가가 보더라도 아이가 얼마나 이 순간을 즐거이 만끽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아이는 최선을 다해 자기 사람의 귀환을 반긴다. 하지만 잘 시간. 


아이는 더 이상 흥분해선 안된다. 잠의 기운이 몸과 정신을 감싸야한다. 그래야 눈을 감을 수 있다. 난 방해자. 아이는 낮에 없던 날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에너지를 리셋하려 총력을 기울인다. 그 사이 오랜 리듬이 깨진다면 누구에게도 결과는 좋지 않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잠의 요정을 소환하고 나는 잠시 사라진다. 다시 만난 기쁨은 밤을 꼬박 채울 만큼이지만 내일도 내일모레도 모두 괜찮아야 하니까. 아이는 어느새 자신의 둥지에서 잠든다. 저녁도 먹고 간식도 먹고 치카치카도 하고 물도 먹고 기저귀도 다시 갈고 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잠들기 전 모든 것이 완료되어야, 그래야 잠들 수 있다. 아이가 자면 아이의 흔적을 지운다. 내일 일찍 눈을 뜨면 다시 새로운 세상으로 시작하게 해주기 위해. 제자리로, 장난감을 제자리로, 수건을 제자리로, 책을 제자리로, 크레파스와 인형을 제자리로. 모두 그렇게 원래의 자리로, 아내도 나도 아이의 곁으로 눕는다. 


아니, 그전에 우리는 저녁을 나눈다. 아내는 아이와 나눈 시간을 이야기하고 나는 주로 듣는다. 내가 나눌 것들은 어떻게 일을 했고 어떤 사람들이 좀 특별하거나 특이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거나 휴가를 내거나 휴가를 내는 동안 어떻게 하거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거나 집의 곳곳은 어떻게 하거나... 어른들의 대화와 연인들의 대화와 부부의 대화를 섞는다.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댄다. 옅은 목소리로 위로한다. 남은 일들을 함께 하며 시간을 부드럽게 쓸어 담는다. 잘 시간이 줄어들지만 우리는 서로의 얼굴 볼 시간도 너무 적기만 했다. 아이의 이불을 살피고 방의 온도와 습도를 살피고 머리칼이 땀에 젖을까 살피운다. 잠결에도 강아지처럼 구르고 엎어지는 아이는 이따금 자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더 자주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새벽을 가리지 않고 소리 내고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이가 깨면 같이 깨고 아이가 자도 깨어 있는다. 새벽이 다 타오른 후 아침이 온다. 아이는 소리 내며 잠을 거두고 나는 다시 우유를 먹인다. 


계획이 있다. 타인들에 의해 경로가 정해질 것이다. 나는 움직이고 길은 너희들이 준비할 것이다. 방향을 잡고 기다리고 잠시 숨을 고른다. 아이와 아내는 내 어깨 위가 아닌 양 옆에서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있다. 이들을 위한 세계를 위하 남은 모든 세계의 계획을 뒤틀어버릴 수 있다. 모든 관계를 리셋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타올라야 이들에게 온기를 전해줄 수 있어서 나를 보존하고 하여 우리를 보존하여 시간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현재의 위치와 내일의 약속 장소를 내내 체크한다. 길을 잃어도 돌아올 곳은 분명하다. 의도적 실패가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 주어진 것들로는 새것을 만들 수 없고 새것을 만들 수 없다면 나아가지 못한다. 실패를 통해 동력을 생성하고 새로운 동력을 통해 다른 터널을 뚫어야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간관계, 처세, 회사에서의 인내심 등이라 언급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현재의 벽을 균열시킬 수 없다. 새 것을 위한 파괴, 의도적인 변수, 변칙과 무관심, 가장한 우연들로 성과는 도출되어야 한다. 돈으로 돈을 벌 수 없기에 모험에 익숙해져야 하고 순위를 매기는 관습에 안녕을 고해야 한다. 혼자만의 레이스, 또는 아무도 인정할 필요 없는 숫자들, 새로운 관계와 근사한 화학작용들. 일부러 길을 잃고 지도를 찢고 주저앉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 속에서 가장 즐거운 것들을 선별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방식을 제외한 방식으로 돈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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