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킥을 부르는 기억들
흑역사.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인데, 찾아보니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단어다. 의미는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 나에게도 돌이켜보면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있다.
키워드는 중력파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중력파를 넣어보니, 이런 설명이 나온다. 중력파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예측된 것으로 시공간 자체의 뒤틀림을 통해 전파되어 가는 중력의 주기적인 변화를 뜻한다. 고작 두 문장으로 설명되어있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우선 일반상대성이론부터 막힌다. 이 두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이 중력파가 검출됐다. 중력파를 검출하기 위한 노력이 100여 년 만에 빛을 본 것. 과학계의 큰 성과였으며 핫 이슈였다. 당시 과학 전문 채널에서 앵커로 뉴스를 진행했던 시절이었는데, 중력파 검출은 한동안 우리 뉴스의 헤드 라인을 장식했다. 이해하지 않으면 뉴스 진행이 어려워서 상대성이론과 중력파 공부에 몰두했다. 새벽까지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하고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물리학과 교수님과 전화 연결 해 중력파 검출의 의미를 인터뷰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방송이 끝난 후 피디 선배의 한마디가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교수님, 앵커들 세 명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아마 나는 내가 공부한 내용을 기준으로 이해하고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주의 먼지만한 지식이었을테다.
게다가 전화 인터뷰는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을, 제한된 시간에 온전히 목소리만 듣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설명을 적절하게 정리 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대본에 없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도 있다. 배경 지식 공부가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나였다면 전화 인터뷰 대상자에게 양해를 구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미리 취재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른 인터뷰이를 섭외해 사전 취재를 했을 것이다. 노력과 준비는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기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또 다른 흑역사 키워드는 기싸움이다. 무대든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은 기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에너지가 넘치고 목소리가 크다거나 우악스러워야 한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기운, 기세가 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는 20대 중반. 생방송 뉴스에서 국회의원을 인터뷰하는 상황이었다. 대본도 완벽하게 숙지했고, 배경 지식 공부도 철저하게 했다. 꼼꼼하게 준비한 만큼 자신만만하게 방송을 진행했다. 특별한 문제 없이 방송은 흘러갔지만 진행자 입장에서도 느꼈다. 상대방의 기운과 기세에 밀리고 있다는 것을.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마지막 질문이 기억나는데, 청와대에서 부르신다면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였다. 상대방은 조근 조근 차분한 언어로 답변했고, 나는 힘없이 허공을 떠도는 기분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뉴스를 마치고 돌아와 상사에게 크게 혼이 났다. 분명 원고를 나의 언어로 곱씹어 질문을 했고, 큰 문제 없이 방송을 마쳤지만 카메라 넘어서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기세에 밀리는 진행자의 모습이.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그 때를 어떻게 복기하고 반성해야 할지 모르겠다. 20대 앵커와 60대 국회의원. 사안은 민감한 정치 질문. 때로는 질 수밖에 없는 상대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