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절이 싫었다.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에서 몇 등 하니? 부터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해 더 이상 등수 얘기는 안 듣나 싶었는데 새로운 복병이 생겼다. 바로 모니터링.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저마다 화면 속의 나를 두고 한마디씩 보탰다. 지금에야 그들도 화면 속 나의 얼굴에 익숙해졌고, 나도 맷집이 생겼다. 하지만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속상해하고 곱씹어 생각하고 괴로워하던 날들이 있었다. 왜 외모에 대해 쉽게 평가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놓을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불편한 상황을 모면했던 내 모습이 한없이 못나보이기만 했다.
비단 친척들 뿐이랴. 단골 식당 사장님, 친구의 친구, 어린 시절 은사님, 이름 모르는 수많은 시청자들까지. 이미 회사에서 상사와 선후배, 전문 모니터링 요원의 평가를 받는 것도 모자라 불특정 다수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마음의 부담이었다.
특히 여성 앵커를 대상으로 한 외모 품평은 꽤나 직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고심해 앵커 멘트를 고치고 클로징을 썼는지, 목소리 컨디션이나 전달력은 어땠는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유튜브가 보편화되면서 뉴스 앞, 뒤로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코너가 생겼다. 뉴스를 진행하는 동안 실시간 채팅으로 불특정 다수의 의견을 확인해야 했는데, 늘 빠지지 않는 게 외모 품평이었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댓글을 보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뉴스를 진행한 날도 있었다.
세태를 한탄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본질을 알아주든 외면하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누군가는 나의 앵커 멘트를, 오늘의 클로징을, 표정과 톤의 변주를 알아봐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