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위협
큰 변화가 없다면, 이런 상황은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사실 자살해서 죽은 사람은 자살 문제라는 빙산의 꼭대기일 뿐이다. 해수면 밑에는 타이타닉호를 수십, 수백 척 가라앉힐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본체가 숨어 있다.
우리나라는 자해해서 응급실에 실려온 사람을 자살시도자로 본다. 물론 모든 자해가 자살시도는 아니다. 그저 상처만 내기 위해 자해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자살할 생각이 없었어도 실수로 치명상을 입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의도와 상관 없이 모든 자해는 마음이 위태롭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자 자살로 가는 첫 단계다.8) 실제로 어떤 이유로든 자해해 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9) 그러니 칼로 피부 겉면만 긁다가 포기한 사람도 자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자살은 자살 문제의 꼭대기이고 자해는 거기까지 올라가는 과정이다. 딱 한 번의 시도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그 과정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자살 위험군이다.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에는 청년 9,378명이 자살을 시도했다.10) 같은 해 폭행당해서 응급실로 실려 온 청년보다 2.4배 많고, 자살로 사망한 청년보다 2.6배 많다. 2016년에는 청년 자살시도자가 만 명을 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하기 직전인 2019년에는 청년 14,421명이 자살을 시도했고, 2021년에는 16,507명이 그랬다. 2019년에서 2021년 사이에 청년 인구가 44만 명 정도 감소했는데도 이렇다. 타이타닉에 탑승하려다 실패한 사람 역시 인구가 감소한 만큼 줄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규모가 상당하지만, 우리나라 자살시도자 통계는 빙산의 크기를 다 보여주지 못한다. 모든 자살시도자가 응급실에 실려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응급실에 올 정도로 큰 상처를 입히는 데에 실패하거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살을 시도했다면, 자살시도자는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다. 나 역시 자살을 시도했지만, 상처 하나 내지 못한 탓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따라서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전문가를 찾는 사람이 10분의 1 밖에 안 되는 것처럼,11) 모든 자살시도자가 응급실이나 다른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계 밖에 있는 청년 자살시도자는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지 않는 한, 자살시도자 수를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라마다 통계를 작성하는 방식이 달라서 해외 통계를 참고하기도 어렵다. 다만 대략 추측할 수는 있어 보인다. 국제보건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자살할 때 스무 사람이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12) 이 비율대로 계산하면, 2003년부터 2022년까지 20년 동안 청년 6만7천 명 정도가 자살했으니, 같은 기간 동안 약 130만 명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모두가 자살에 성공했더라면, 20년 만에 타이타닉호를 넘어 경기도 수원시가 통채로 침몰할 뻔했다.
다른 연구에서도 청년의 자살시도 현황을 엿볼 수 있다. 202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청년이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조사한 적 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청년 5.6%가 자살을 시도한 적 있는 경우였다.13) 2005년에 서울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조사 참여자 3%가 살면서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14) 2012년에 충청도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2.6%가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15)
낮게 잡아서 청년 2%가 평생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다고 가정하면, 2022년 인구 기준으로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해 본 청년은 30만 명에 달할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신질환을 진단받아도 전문가를 찾는 사람은 10분의 1 수준이다. 자살시도자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2021년에 응급실로 온 청년 자살시도자가 16,000명 정도 였으니 같은 해에 대략 16만 명의 청년이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과학적으로 엄밀한 추측은 아니지만, 통계 밖 청년 자살시도자가 자살자보다 훨씬 많다고 볼 단서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앞으로도 청년 자살시도자는 꾸준히 나타날 듯하다. 2014년 응급의료 통계에서는 10-19세 자살시도자가 2,389명이었는데, 이게 2019년에는 4,598명으로, 2022년에는 5,879명으로 늘었다.
물론 응급실 밖에는 더 많은 청소년 자살시도자가 있을 것이다. 2018년에 교육부가 중고등학생 90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 있다. 그 중에서 7만 명이 자해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16) 우리나라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곳인 만큼, 실제로 자해해 본 청소년은 응답자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WHO가 이야기한 1대20 비율대로 계산하면, 2003년부터 2022년까지 자살한 10대 청소년이 6천 명 정도이니, 같은 기간 동안 자살을 시도한 10대 청소년은 약 12만 명에 달할지도 모른다.
이 청소년들이 청년이 되어서 위태로운 사회환경에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한 번 자살을 시도해 본 사람은 또 한 번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자해를 저질러 본 청소년은 나중에 더 치명적인 자해를 시도할 수도 있다. 적절한 도움이 없다면, 저 많은 청소년들이 청년기에 또 한 번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그 결과, 저 청소년들은 훗날 청년 자살률 통계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자해 경력이 있는 청소년은 잠재적인 청년 자살자나 다름 없는 셈이다.
통계에 잡힌 청년 자살시도자는 1년에 만 명을 넘어섰다. 실제 자살시도자는 그 몇 십 배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이미 자살 문제를 겪은 사람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자살이라는 늪에 다른 사람들보다 깊게 들어와 있다. 자살 대책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청년기에 치명적으로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실제로 2023년에 또 한 번 청년 자살자가 늘어난 걸 보면, 숨어 있는 자살 위험 청년이 도처에 있는 듯하다. 국군 예비전력은 점점 부족해지고 있지만, 청년 자살 위험군은 충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