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아이들은 숨이 차 허리를 피지도 못하고 헉헉댄다.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떠올랐다. "다 왔어~ 10분이면 도착하겠다" 나는 씩 웃으며 거짓말을 해본다. 매번 당하면서도 아이들은 내 말을 믿는다. 나뭇가지에 인형을 매달고 아이들 눈앞에서 흔들며 걷는다. 인형은 잘 걷는다며 칭찬해주면 둘째 눈이 번쩍 빛난다. 씩씩 거리며 인형을 쫓아 걷는다. 나무에 사탕을 숨겨 두고 보물 찾기도 해 본다. 아이들은 사탕 찾는 재미에 힘든 걸 잊는다. 얼러가며 정상을 향해 걷는다. 2시간 만에 산머리에 도착한다.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 앉아 가방을 푼다. 가방 안에는 보상이 가득하다. 평소에 못 먹던 젤리와 과자에 아이들은 행복해한다. 오늘도 성공이다. 어플 속 걷기 기록은 만보를 넘어간다. 아마 아이들 걸음으로는 배는 걸었으리라.
25년 전. 경기도 어느 산속. 입이 댓 발 나온 내가 있다. 남동생은 뒤에서 내 신발 뒤축을 툭툭 차며 걸음을 재촉한다. 아빠는 굵은 나뭇가지로 나를 끌어준다. 산 다람쥐 같은 엄마는 이미 보이지도 않는다.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여기 가만 앉아 있을게. 정상 갔다 내려오세요" 칭얼거려 보지만 내 말을 들어줄 턱이 없다. 아빠 손에, 남동생 성질에 밀려 밀려 정상으로 향한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는 운동광이다. 몸살 기운이 있어 소파에 누워 있으면 아빠는 땀복을 내민다. 동생은 그 길로 운동화 신고 나가 1시간 뒤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다. 얼굴에 개운함이 가득이다. 푹 자고 일어나면 감기는 저 멀리 달아난다. 약 대신 운동인 셈이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빠는 운동이 곧 일이었다. 구보로 행군하는 건 생활이요 산 타기는 일상이었다. 쉬는 날에도 체력관리는 놓지 않았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습관처럼 체력 단련을 한다.
엄마는 타고난 체력왕이다. 부대 내에서 가족운동회라도 열리면 상을 쓸어 왔다. 분명 한 달 전 탁구채를 처음 잡아 봤는데도 경기에 나가면 1등은 엄마 차지였다. 행동도 어찌나 재빠른지 산에 갈 때마다 날아다녔다. 승부욕도 강해 아빠와 테니스 대결이라도 할라 치면 눈에 불꽃이 일었다.
남동생은 운동 마니아다. 7살 때 아빠 산행에 같이 간 적이 있다 한다. 동생은 슬리퍼를 신고도 장교들 앞을 치고 나갔다. 지켜보던 대령이 누구 아들이냐고 물었다는 일화는 명절마다 듣는 아빠의 자랑거리다. 남동생은 운동회의 꽃, 계주의 마지막 주자였다. 오래 달리기 전교 1등. 체력 1등급. 대학에 가서는 권투를 시작해서 기어이 프로 타이틀까지 따냈다. 계측 몸무게를 맞추려 물도 못 마시고 고생을 하다가는 눈도 못 뜨게 맞고 들어오는 짓을 왜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집에서 나는 돌연변이 같았다. 서있는 것보다 앉는 걸 좋아했고 앉는 것보다 눕는 걸 좋아했다. 개울가에 데려 다 놓으면 앉혀 놓은 자세로 한 시간을 멍 하고 있었다. 가족들에 비해 운동신경도 떨어졌다. 부모님은 운동은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가족운동회에서 늘 점수판을 맡았다.
굼뜬 나는 배드민턴도 테니스도 하다못해 팽이 돌리기도 어려워했다. 못하니 하기 싫어했다. 집에는 책도 있고 스케치북도 있고 재밌는 것 투성인데 왜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지 불만이 많았다. 부모님께서는 싫다 싫다 하는 나를 20살 되던 해까지 끌고 다니셨다. 나도 지치지 않고 20살 될 때까지 투덜거렸다.
성인이 되고 취직을 하며 드디어 체력단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말마다 늦잠을 잤다. 몸은 통통해졌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적금 깨듯 쌓아 놓은 체력을 야금야금 깨 먹으며 보냈다. 체력은 비밀스러워서 쌓이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느릿하게 감소되던 체력은 잦은 야근으로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곤함이 밀려와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육아는 극한의 체력검증 시간이었다. 남은 체력은 성격이 되었다. 애꿎은 아이와 남편에게 짜증 내는 일이 늘었다. 내 기분은 집안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요가를 시작했다. 하원 후에는 놀이터에서 2시간을 뛰어다니며 놀아주었다. 한 달이 지나자 마음이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몸을 튼튼히 하려 시작한 운동은 내 마음까지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짜증병이 돋았다. 고작 몇 시간 내어주는 걸로 예민해지는 내가 꼴 보기 싫었다. 신발장에 자고 있던 등산화를 꺼내 뒷산을 올랐다. 왕복 2시간뿐인 짧은 코스지만 매일 하기에는 적당하다.
“체력은 국력! 체력이 곧 정신력이다!” 듣기 싫었던 잔소리였다. 하지만 이제 안다. 체력이 국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중요한 일임을 말이다. 이제 어릴 적 그렇게 싫어했던 체력 단련을 내 아이들에게도 강요하고 있다. “억지로 시키지 말자!” 나의 교육 철학이지만 운동은 예외로 두었다. 살면서 자산이 될 것임을 몸 소 느꼈기에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투덜대는 가족을 이끌고 주말마다 운동을 나선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둘째는 6살 되던 해 왕복 5시간 코스 간월재 등반에 성공했다. 영유아 검진 하위 10% 안에 드는 말라깽이 첫째도 어른 걸음 만보는 어렵지 않게 따라온다. 모두의 저항 속에서 나는 승리한 듯하다.
친정에서는 내가 운동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자발적으로 가는 거 맞냐고 몇 번을 묻곤 한다.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이렇게 바꾸기 어렵나 보다. 억울해진 나는 아이들도 이제 잘 걷는다고 큰소리를 뻥뻥 첬다. 작년 추석. 엄마 아빠는 누워있는 나 대신 아이 둘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보내신다. 사진엔 쌍코피 터진 둘째가 있었다. 사진을 보고 다시금 한계를 느꼈다. ‘아. 우리 엄마 아빠 따라가려면 멀었다. 아직도 한 참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