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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Sep 07. 2023

나를 위한 어시스트, 루틴

 손흥민이 경기장에 들어설 때마다 반복하는 행동이 있다. 사이드라인을 오른발로 밟으며 점프, 다시 오른발로 착지, 잔발로 지그재그 달려가면서 마무리. 손흥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도 자체적으로 개발한 루틴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만 속이 시원할까’란 생각을 할지라도 선수들은 진지하다. 최고의 역량을 펼치고 싶은 마음의 시작이니까 경건할 수밖에. 역시나 루틴은 스포츠 선수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전날 술을 마신 동기를 깨우는 건 레몬에이드인 것처럼 사람들도 각자만의 루틴이 있다. 정상을 지키기 위한 선수들 마냥 우리도 정상 컨디션을 지키기 위해 알게 모르게 힘쓰고 있다.


 3년 차 카피라이터인 나에게도 마찬가지. 광고업계 특성상 업무가 미친 듯이 파도칠 때가 있지만 그 순간들이 무색하게 여유로운 날도 밀려오기도 한다. 그땐 양양 서퍼비치에서 서핑하듯 인터넷을 쏘다닌다. (향후 아이데이션에 도움을 주는 명목으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거나 노션을 열어 글을 쓴다. 그렇게 간간히 서핑한 지 3년 차가 되니까 매주 반복되는 일정이 생겼다. 내게도 루틴이 생긴 것. 월요일마다 하는 필사인데 유병욱 CD님의 카피 강의를 듣고 시작했다. 타이핑도 좋지만 손으로 직접 쓰는 걸 추천하셨고 책상에 방치되고 있었던 연필과 노트도 이제 할 일이 생겼다. 필사를 시작하기 전 뭉뚝한 연필심을 사각사각 뾰족하게 다듬는다. 이미 노션에 옮겨 놓은 필사할 문장들을 펼치고 노트에 옮겨 적는다. 타이핑 때와는 다르게 문장이 뾰족하게 들어온다. 15분 정도 끄적거림이 이어지면 꽉 쥔 오른손의 피로감이 급격히 몰려온다. 온전히 수긍하고 필사의 마침표를 짙게 누르며 생각한다. ‘이번 주 필사는 여기까지’. 타협이 빠른 편이다.


 회사 생활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루틴도 명확해진다. 카피라이터 대선배이자 우리 회사 상무님을 보면 하루의 시작 루틴은 이렇다. 오전 7시와 7시 30분 사이에 도착. 테이블에 놓인 신문을 읽으신다. 출근한 직원들의 인사에는 “좋은 아침”이라 답하시고 입가에 미소를 띠시기까지. 덕분에 우리도 좋은 아침을 마주하게 되고 각자의 하루의 루틴 또한 시작된다. 상무님께 인사를 마치고 컴퓨터를 켠다. 자연스레 크롬에 마우스가 가고 즐겨찾기 되어있는 리스트를 순서대로 누른다. 회사 포탈을 키고 듀얼 모니터엔 TVCF, 해외광고사이트, 유튜브까지. 그 다음은 살짝 환기도 시킬 겸 선풍기를 틀어 놓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오는 게 내 하루아침의 모습이다. 다른 분들을 보면 향수나 립스틱의 정렬을 나란히 하시기도 하고 룸스프레이를 허공에 뿌리기도 또는 달력을 열어 스케줄을 먼저 확인하는 등 다양한 루틴들이 공존하는 사무실의 아침이다.


 지극히 사소한 행동들이라도 하나의 루틴이라 불릴 수 있다. 지키지 않는다고 큰일 나는 과정은 아니지만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는 행동. 어쩌면 마음의 안정을 1%라도 채울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일 수 있다. 심지어 딴짓하는 것도 하나의 루틴이 될 수 있다 믿는다. 아이데이션을 하다 보면 생각의 깊이가 지하 200m로 갈 때가 있다. 땅을 파는 데에만 집중되어 아무리 위에서 돌아오라고 불러도 들리지 않는 경지. 곧 노다지가 나올 것 같아 막상 돌아가기 아쉬운 그 순간. 이런 리스크를 방지할 수 있는 훌륭한 노하우는 딴짓이 될 수도 있다. 유명 카피라이터분들 강의에서도 그렇고 우리 팀 CD님도 마찬가지로 시간의 격차를 두고 본인의 카피를 다시 보라고 하셨다. (오직 나만의 기준으로) 기깔난 카피 한 줄이 생각났을 때! 한 줄을 일필휘지로 쓰고 자리에 일어나 화장실을 간다. 힘차게 카피를 썼다란 기운만 간직한 채 손을 씻거나 기지개를 켠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카피를 읽어보고 다음 카피 한줄을 쌓는다. 골키퍼가 예측하지 못한 완벽한 슛을 위해 골문 바로 앞이라도 한 번 꺾고 반박자 빠른 슛을 하듯. 카피를 쓸 때도 아이데이션 할 때도 딴짓이란 루틴은 중요한 순간 나를 위한 어시스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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