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이 무한하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하다. 누구를 만나도 헤어질 때가 있고 일을 하더라도 기한이 있다. 물건을 소유하더라도 수명이 있고 먹는 음식도 유통기한이 있다. 눈덩이가 불어나듯 다 순간순간이 모여 덩어리가 되고 바람이 불듯 스쳐가는 것이 시간이다. 오늘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는 시작이 있고 퇴근하는 시간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면 새 가정을 꾸미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난다.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되어간다.
과거와 미래는 과연 존재할까라는 질문에 투표를 하라고 한다면 나는 “아니오.”에 한 표를 던지겠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시간의 순간순간은 삽시에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되어간다. 그러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손놀림을 자랑하는 소매치기가 있다 하더라도 시간의 은밀한 속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래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관념 속에서 느끼는 것이라고하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사로잡혀 나오지 못한다면 어떨까. 시간이 훔쳐가 버린, 다시 찾아올 수 없는, 그 시간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고 보이지 않는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용기를 내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품격 있게 맞이하는 데에 중요할 것이다. 며칠 전에 막을 내린 파리올림픽 양궁종목에서 3관왕을 했던 김진우 선수가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금메달도 과거다. 되돌아보지 않겠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좋은 추억일지라도,또는 안 좋은 기억이 있더라도현재를 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다만 과거를 스승으로 여기며 현재를 품위 있게 사는 데에 지표로 삼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보다 아들러의 목적론을 더 선호하는지 모른다.
전에 딸이 명품을 가지고 싶다고 했을 때 아내가 "그때 잠시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그게 그거더라고."라고 말했던 것처럼 갖고 싶던 것을 소유하게 되면 그 익숙함에 그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취하게 되면 귀한 것을 잘 모르게 되어 겸손과 감사를 잊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저 그런 사람, 좋은 사람, 지금도 만나고 싶은 사람 등 여러 부류다.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지금 만나고 싶은 사람일까. 탔던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이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과거처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한 것일까. 역설적인 가정일지라도일상에서는 미래를 조금은 선택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지금 내가 글을 쓰면서 다가오는 글의 내용에 어떤 단어를 선택하며 글을 써내려 가는가에 있어서는 말이다. 아내와 이따가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를 상의하며 결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 속의 미래를 현실로 맞이하기 위한 노력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시험되어 왔다. 한 예로 스포츠선수들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선수들은 미래 경쟁자들과 가상의 경기장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가정하여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시합에서 이기는 상상을 한다. 마치 미래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또 시험장에서 긴장하지 않고 시험을 치르는 상상 훈련을 하는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얻기도 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상상을 지속적으로 하면 현실이 되어 보답한다는 서적들이 인기가있었던 때도 있었다. 더불어 중장년은 노후를 위해, 수험생은 목표한 점수를 달성하기 위해, 취업생은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국가는 재난을 대비하고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미래를 위한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미래를 걱정하며 안 좋은 결말의 시나리오로 불안해하며 현재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잠시 쉬어가도 되는데 아등바등 자신을 안달복달하며 말이다. 이처럼 미래는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내느냐에 따라 달려있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