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다녔던 직장에서는 나름대로 인정을 받으며 동기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그랬던 그녀는 남편의 권유로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주부로서 이십 년 이상을 살았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두 번 연애를 했다. 처음에는 대학 때, 두 번째는 직장에 들어간 후다.
정우를 만난 것은 그녀가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고 서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그가 집에 가는 길에 그녀에게 다가와서 사귀고 싶다고 했던 날이었다. 지금이야 함부로 낯선 사람에게 말도 붙이지 못한 세상이지만 그때는 남학생이 마음에 드는 여학생에게 정중히 다가가 말을 거는 일이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던 시절이었다. 여학생은 멋있는 남학생이 다가오더라도콩닥콩닥하면서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그날도 저녁에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죄송한데 잠시 만요.”
“왜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시죠?”
“저....... 이 동네 사시죠?”
“네, 그런데요?”
“저도 이 근처에 사는데요. 자주 봤거든요?”
“저를요?”
“..... 네.”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대꾸도 없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는 그녀 옆을 떠나지 않았다. 집에 다다르자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대문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남자가 따라와 자기에게 말을 붙인다는 사실에.
책상 옆에 있던 거울을 보았다. 키는 165센티에 긴 머리는 고무줄로 자연스레 묶고 있었고 얼굴에 화장기는 하나 없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남자들이 가끔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줄행랑을 치고 말았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잠에서 깬 그녀는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아침 햇살을 타고 들어왔다. 키가 컸던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선한 인상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대문을 나섰을 때였다. 어제 그가 집 모퉁이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 아침 햇볕은 집 앞 골목길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먹고 있었다. 그도 그녀의 마음을 눈가늠으로 알아챘는지 진동으로 느낀 것인지 어제보다는 조금 덜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 옆을 지키며 걸어가고 있었다.
“저.... 안녕하세요.”
“네....”
그녀는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 익숙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성인이 되고 처음이었다. 그러한 따스함은. 부모에게 받은 것과 다른 것이었다. 울림이 강했다.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