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피우시나요?
아뇨. 안 피지만 지금 혹시 한 개비만 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 때문이라면 안 펴도 돼요.
아닙니다. 지금 오랜만에 피고 싶네요.
정연은 영근에게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건넸다. 영근은 오랜만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몸 안에 검은 연기가 들어오는 쾌감에 영근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저 때문에 따라서 피시는 거 같은데.
아닙니다. 저도 취재할 때 가끔 펴요.
정연은 이러한 영근의 태도가 첫인상과 너무 다르면서도 어색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큰 뿔테 안경과 대충 손질한 머리 스타일을 보자마자 정연은 체기가 온 듯한 답답함이 가득했다. 흰색 와이셔츠와 슬랙스도 한 치수 커야 할 것 같았다. 빨리 인터뷰를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영근은 사람을 묘하게 끄는 힘이 있었다. 대화를 이끄는 기술이 탁월했다. 언제 첨언을 해야 하는지, 언제 경청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마치 밀당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연인처럼, 절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게 먹어도 정신 차리면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다 말할 것 같았다. 영근의 다소 꽉 끼는 와이셔츠와 슬랙스도 나쁘지 않게 보일 정도였다. 요즘 드라마 업계가 위축되었다는 말만 하려는 정연도 정신을 차리니 자신이 처음 총괄 프로듀싱했던 사극의 비하인드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영근과 대화를 나누면서 정연은 마음을 계속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피우겠다고 한 것도 정연이었다. 인터뷰를 잠시 멈춰 자신의 템포로 대화를 진행하고 싶었다.
아끼시는 후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영근은 정연이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은 주제를 꺼냈다.
아, 네.
그런 후배가 참 위안이 되죠. 저도 그런 후배가 하나 있었습니다.
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근은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모든 면에서 저보다 뛰어나서 질투심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저희 사건팀은 두 가지 기사를 씁니다. 단독기사랑 기획기사라고 하는데요. 단독기사는 할당된 경찰서나 법원, 병원, 소방서 등을 돌면서 얻은 소스로 쓰는 기사를 말합니다. 단독, 대림동에서 조선족끼리 칼부림. 뭐 이런 기사입니다. 기획 기사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기사입니다. 뭐 대체복무의 명과 암,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의 이면, 출산율 0.7의 대한민국, 뭐 대략 이런 종류의 기사들입니다. 기자들이 보통 하나에 강점이 있으면 다른 하나는 약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친구는 두 가지를 모두 기가 막히게 썼습니다. 매일 9시에 카카오톡으로 발제, 그러니까 기사 소스를 발표하는 일을 하는데, 그 친구 아이템은 킬 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렇군요.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당연히 관심이 갔죠. 게다가 일 년 후배인 데다가 관심사도 비슷해서 죽이 잘 맞았습니다. 캡, 그니까 정연 님 같은 직급의 저희 팀장 욕도 같이 하고요.
정연은 피식 웃었다. 영근은 이렇게 중간에 유머를 섞는 기술도 탁월했다.
되레 제가 의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후배 있으면 든든하죠.
그런데 죽었습니다.
네?
집에 불이 났어요.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질식사였습니다. 하…. 혹시 한 대만 더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네….
정연은 영근에게 담배를 건넸다. 영근이 담배를 물자, 정연은 영근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영근은 담배를 한 모금 크게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유서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정연은 경수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는 생각에 영근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평소의 정연이라면 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어떤 점이요?
그 친구의 유일한 혈육은 외할머니 한 명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는 치매가 상당히 진행되어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명의로 그 친구의 사망보험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3억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불과 한 달 전에 든 보험이었습니다. 죽음의 방식이나 보험에 가입한 기간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선택한 거군요.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영근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덧붙였다. 영근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보험사는 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뻐팅겼어요. 나중에는 사망의 원인이 의심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후견인 등록을 하고, 지급하지 않을 시 소송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보험금을 지급했습니다. 후배는 아는 것 같았습니다. 선배, 이 정도는 나서서 해주실 수 있죠?라고 저한테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생하셨네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 친구는 죽음이라는 세계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자살의 길을 택한 거였어요. 치매가 왔지만, 생의 의지가 있는 할머니가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면서도 자신은 죽음으로 갈 방법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기자라는 직업을 택한 거죠? 돈 잘 버는 다른 직업들 많잖아요.
기자라는 직업이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가장 자영업과 가깝습니다. 자유가 굉장히 많이 보장되어 있어요. 아침 9시에 기사 발제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 오후 네 시에 기사를 작성해서 보내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입니다. 대부분은 남은 시간에 경찰서와 법원을 돌면서 단독기사 소재를 찾거나 기획 기사를 위한 인터뷰를 합니다. 대부분은 그래서 일반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보다 일에 투자하는 시간이 더 많은 편이죠. 하지만 그 후배의 능력이라면 일을 다 해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남았겠죠. 그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후배의 할머니가 치매가 오고 나서도 매일 여행을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참….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효자네요.
효자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테스트이기도 했을 겁니다. 할머니가 항상 가장 염원하던 것을 본인이 함께해 보면서, 그 행위에서 이 세계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할머니라는 존재에서 찾아보려 한 거죠. 안타깝지만 찾지는 못했던 거 같아요. 후배는 할머니랑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에 죽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둘은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저는 정연 님이 저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네?
아끼시는 후배 중에 한 분이 이경수 씨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지금 경수 씨가 바로 그 단계에 있습니다.
지연은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어색해했다.
구루 님의 눈을 보는 것 같아.
경수는 지연의 그 말 한마디에 지연이 구루가 말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연에게 보이는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색은 카메라를 켜면 일순간 사라졌다. 마치 카리스마가 형형한 눈을 보면 일순간 압도당하는 것과 비슷했다. 지연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색이 사라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지연은 형형색색의 색깔이 마지 밝은 무지개처럼 섞여 있는 아름다운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 빛나는 색은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 바로 사라졌다.
그냥 언니랑 논다고 생각하면 돼.
노는 게 아니잖아. 구루님의 말씀인데.
구루님이 뭐 별거니.
언니!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면 안 돼.
지연은 경수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 모습마저도 경수에게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알겠어, 지연아.
흥
지연은 카메라에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지연에게 다시 무지개가 나타났다.
지연아, 언니랑 놀자, 카메라 치울게.
경수는 카메라를 해체해서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켰다. 지연은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가 없어진 것을 보고 지연은 경수에게 달려들었다. 지연에게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피톤치드 같은 향이 났다.
지연아
응!
지연이는 답답하지 않아?
뭐가?
계속 여기에서만 지내야 하잖아. 저기 대문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난 언니만 있으면 돼.
언니 없을 때도 많잖아.
그러면 벽장에 들어가면 되지.
음….
경수는 지연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계속 이어가야만 했다.
거기서는 다른 세계에 가는 거잖아. 여기 바로 문밖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는 안 궁금해?
다른 세계겠지 뭐.
그렇긴 하네.
경수는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연의 머리를 찰랑거리는 긴 갈색 생머리였다.
새로운 친구들을 보고 싶지 않아?
친구들은 여기에도 있는데?
그래도, 여기에 있는 친구들 말고.
구루님이 여기 있는 사람들만 봐야 한다고 했는데.
구루님 없다고 생각하고 말해보자.
구루님이 알면 화내실 텐데.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되지.
알겠어.
지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궁금해!
진짜?
응. 내가 벽장에서 본 거랑 다른 세계도 있을까.
당연하지.
어떤 게 있어?
음…. 글쎄. 사람들이 춤추는 걸 영상으로 찍어서 올려. 혹시 본 적 있어?
우리 매일 아침에 하는 체조 같은 거 말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동작이 화려해
그렇구나. 그건 본 적 없어.
홍 박사와 마라탕후루, 그리고 잘 자요, 아가씨, 티라미수 케이크의 숏폼 세계는 아직 지연이한테 도달하지 않았다. 되려 다행인가 싶었다.
나가보고 싶지 않아?
구루님이 화내시면 어떡해
지연이는 특별하니까, 이해해 주실 거야.
그런가? 언니, 난 특별해?
응. 엄청나게 특별해.
내가 널 이 세계에서 꺼내고 싶을 만큼이라는 말을 경수는 애써 삼켰다. 너를 꼭 여기에서 꺼낼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경수는 지연이 벽장 안에서 본 이야기를 묻는 것으로 촬영의 방향을 바꿨다. 지연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주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달이 두 개인 세상에서의 킬러 이야기를 하기도, 무전기로 과거와 대화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죽은 다음 컴퓨터 안 세계로 들어가서 마침내 사랑을 찾게 되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신진리교 내부에는 허가받은 인원 외에 전자 장비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지연은 경수 덕분에 컴퓨터와 핸드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연이 말한 세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상상한 게 아니라 실제로 있는 곳으로 가게 돼
그게 현실이 아니라 책 속의 세계일 수도 있는 거구나
그것도 현실이야, 언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실도 여러 세계 중 하나야. 구루님의 책하고 영상밖에 못 봤지만, 각각의 책도 각자만의 독립된 세계가 있고, 영상도 마찬가지야. 현실도 그중 하나지. 현실이 가장 큰 세계도 아니야.
그렇구나. 그러면 지금까지 지연이가 본 세계 중에 제일 좋았던 세계는 뭐야?
제일 좋았던 세계?
응.
구루님의 세계지.
혹시 그건 구루님이 그래야 한다고 지연이한테 말해서 그런 거 아닐까?
쉿! 구루님이 들으면 어떡해! 구루님은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듣는다고.
그러면 너무 눈 하고 귀가 아플 거 같은데.
아니야, 구루님이 그렇다고 하셨어.
그러면 그거 빼고.
음…. 제일 좋았던 거…. 내가 엄청 넓은 바다 위에 떠 있었는데, 호랑이랑 같이 있었어.
아하
경수가 드디어 아는 세계였다.
그거 지연이랑 호랑이랑 친해지지 않아?
어, 어떻게 알았어?
언니도 그 세계는 봤거든.
진짜?
응. 근데 안 무서웠어?
왜 무서워?
호랑이잖아. 엄청나게 크고 엄청 무섭지 않아?
귀엽던데
귀엽긴 하지.
경수는 지연이 신진리교 밖의 많은 세계를 벽장 안이 아닌 밖에서 실제로 체험하면 얼마나 행복해할지 상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연은 신진리교에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 벽장 안에서의 리트리트가 신진리교와 지연이 공유하는 공통점이라는 게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한동안 지연의 녹음을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연에게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언니, 나 녹음 더 못할 거 같아. 무서워.
무슨 문제?
며칠 동안 계속 같은 세계만 보여.
어떤 세계?
언니가 죽는 세계.
그날 오후, 경수는 오랜만에 핸드폰에서 영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핸드폰에서 영근이 경수에게 인사하자 남자는 경수 앞에서 목에 손을 그으며 기뻐했다. 경수는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라고 직감했다. 정연에게 자신이 한 남자를 만났다는 연락이 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