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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서사가 있다 1

by 로즈릴리

그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나이와 이름 그리고 사는 지역과 직업도 사실대로 말하는 경우가 없다. 단지, 그 남자의 성씨가 이 씨라는 것은 확실했고, IT업계 종사자이며 컴퓨터 프로그램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 정도였다.

마리가 그 남자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안의 연구실이었다. 2월의 끝자락 아직 봄이 되기 전이었지만 2월의 햇살이 놀랄 만큼 뜨겁게 내려앉던 날, 마리는 안의 연구실에 방문했고 그 남자는 연구실에 미리 와 있었다. ‘안’은 서너 종의 푸른 화초를 기르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리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고 앉으라는 말도 없이 자신의 화초에 집중하며 말했다.


“얘 좀 봐, 얘가 얘가 사랑을 주는데도 자꾸만 시들어 가”


그 남자는 마리에게 자신의 나이를 30대 초반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대학원에서 수업을 함께 듣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나이를 30대 중반이라고 말했고, 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본업이 IT업에 종사하며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 의하면 그의 나이는 정확히 마흔 한살이라고 했다. 얼굴이 동안이라 열 살은 어려 보였으므로, 실제 나이가 40대 초반이라 해도 30대 초반의 나이나 30대 중반의 나이라고 말해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어느 날, 마리는 주차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 끝에 서 있던 그 남자가 마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은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고 고등학생 때까지 점심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부잣집 아들 딸이 다니는 연세대학교의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없었고 서울로 대학진학을 할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권유로 등록금이 저렴한 지방 교대에 다녔다고 했다. 마리는 그 남자에게 뭔가 희망적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요즘은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지가 중요해요."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 아직도 혹시 연세대학교에 다니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어요?" 라고 물었다.


마리의 질문에 그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매주 수요일 오전 열시에 ‘안’의 연구실에서 언어학 수업이 있었다. 수업은 겨우 여섯 명만 수강 신청을 했기 때문에, 대형 강의실 대신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리는 언어학 수업시간에 그 남자의 이름이 ‘이승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학교 수업이 끝났다. 감옥처럼 꽉 막힌 문을 열고 이제 막 해방된 학생들의 무리가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학생들은 건물을 빠져나가 비좁은 작은 골목으로 서둘러 걸었다. 맛있는 점심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식당을 향해 걸어가는 학생들의 걸음은 명랑했다. 어서 빨리 식당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수업시간에 꾹 참았던 수다를 떨 것을 생각하니 표정은 대학생이 아니라 유치원생들처럼 해맑았다.

이승후는 점심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등나무를 지나 도서관을 지나쳤다. 이승후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평소 점심을 걸렀으나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 오후 네 시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빵이나 샌드위치 커피와 같은 간단한 간식거리로 아침과 점심을 대신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루에 두 끼 식사면 충분했던 루틴으로 이미 길들어져 있었다.


‘정지희’는 점심을 먹을 생각도 이미 포기하고 이승후의 빠른 걸음 속도에 맞추어 등나무를 지나 도서관을 지나쳤다. 매일 아침을 거르는 ‘지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점심시간이면 평소 식사를 꼬박 챙겨 먹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승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점심도 거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승후는 정지희와 한 약속을 잊었는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어디로 가실건가요?”


정지희가 이승후의 뒤를 조심스럽게 바짝 붙어 따라오며 공손하게 물었다.


“안 선생님의 연구실로 갈겁니다.”


이승후의 단호한 대답에 정지희는 더이상 묻지 않았으나 그녀의 두 눈은 흐려졌다. 교정의 홍매화는 소담스럽게 피었다. 하얗고 붉은 꽃잎들이 겨울의 함박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교정을 이승후와 함께 걷고 싶은 정지희였다. 지난주 수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그날은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이번 주 수요일에 함께 산책하자고 약속했던 사실을 정지희는 일주일 내내 가슴에 품고 지냈다. 그러나 이승후는 그 약속을 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자동차가 있는 주차장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집의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이승후는 자신의 자동차로 정지희의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승후는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지나 안의 연구실 방향으로 향했다.

이승후는 누가 봐도 남자답고 잘 생겼다. 오뚝한 코와 날카로운 콧날, 갈색빛이 도는 건강한 얼굴색과 뚜렷한 이목구비! 그 얼굴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해 보이는 두 눈이 빛났다. 이승후는 성큼성큼 아무렇게나 걷고 있었지만, 그의 단단한 등 뒤에는 우울하고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정지희는 눈물을 머금고 이승후의 단단하면서도 어두운 등을 바라보며 빠른 걸음으로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춰 뒤를 따라 걸었다.



*** 연재 요일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로 설정하였으나 개인적인 사정상 연재 약속 요일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발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너그러이 양해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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