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의 삶은 서사가 있다 2

by 로즈릴리

'안'은 레몬색 수액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병을 여러 차례 흔들었다. 그리고 병 입구를 거꾸로 세워 화분의 흙 속에 넣었다. 여전히 화초 가꾸기에 진심을 보였다. 물티슈로 손을 쓱 쓱 닦고 나서 모퉁이 통로에 놓인 책장 위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안'의 옷차림은 권위에 반항하듯 대충 차려입은 일상복에 귀 위까지 짧게 올려친 머리, 조금 큰 덩치, 저음의 목소리와 연구실에서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는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안’의 본명은 '안나'였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고 안나의 아버지는 안나의 할아버지가 어렵게 얻은 장손이었다. 그런 장손의 가정에서 안나는 넷째 딸로 태어났다.


" 내 다시는 딸을 낳지 않으리라! 딸은 절대로 안 낳아, 않나아.. 안나 안나 "


이렇게 그녀의 아버지가 굳은 결의 끝에 지어준 이름이 성은 노, 이름은 안나! 노안나가 되었다. 그러나 자랄수록 안나는 외형적 생김이 아버지를 똑 닮았고 성격은 딸들 가운데 가장 남성스러워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지방의 항구도시에서 대형 수산물 사업체를 경영하는 CEO이자 지방의 유지였다. 안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사업수완이 좋았고 자본과 용역을 융통성 있게 적시 적재 활용하여 사업을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아들이 없었던 안나의 아버지는 안나가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다.


"안나야, 이 아빠가 말이다. 그러니까 아빠가 스물여섯 살이었을 거야 그때가 아마."


안나의 아버지는 옛날이야기처럼 빗대어 과거에 자신의 고생이나 희생담 같은 '라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안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였다. 하품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던 아버지는 안나에게 의기양양하고 원대한 비전과 흔들리지 않는 오만한 겸손을 상기시켰다.


안나는 보통여자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들이 있었다. 마리와 안나는 고향 친구였다. 마리와 안나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어느 주일날 성당 미사에서 처음 만났다. 안나는 마리 옆자리에 앉았다. 엄숙한 미사에 집중하느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마리 곁에 바짝 붙어 앉은 안나는 낮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시켰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밖으로 나가려는 마리의 옷자락을 안나가 뒤에서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자 안나가 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나의 작은 손바닥 위에 하얗고 동그란 나프탈렌처럼 생긴 신기한 영성체 떡이 서너 개 올려져 있었다.


“ 자, 얼른 먹어봐”


“ 어디서 났어?”


“ 저기 탁자 위 은쟁반에 남아 있는 몇 개 가져왔어.”


“그럼 안되잖아,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알면 혼내실 텐데”


“우리 둘만 알면 되잖아,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니까”


말을 끝내자마자 안나는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동그란 하얀 떡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했다.


“그래도 그건 죄를 짓는 거야 안돼, 우린 유아세례도 아직 받지 않았잖아, 수녀님께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 미사 시간에 먹을 수 있다고 했어.”


“너도 사실 먹고 싶어 했잖아, 아까 미사 시간에 사람들이 떡을 입에 넣을 때 너의 눈빛이 간절히 먹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다 눈치챘어”


안나는 입에 넣었던 떡을 다 먹었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어떤 맛일지 너도 궁금하지?"


사실 마리는 그 하얀 떡이 몹시 궁금했다. 어떤 맛일까...


생긴 것은 엄마가 옷장에 넣어 두시는 소독약 나프탈렌처럼 하얗고 동그랗게 생겼는데 엄마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나프탈렌은 화학약품 냄새가 독하게 났기 때문에, 먹으면 먹는 순간 독약을 먹고 쓰러진 백설 공주처럼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모양과 색깔이 비슷한 하얀 떡을 미사 시간마다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먹었다. 먹고 나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마리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딸랑딸랑 소리가 들렸다. 딸랑거리는 문고리를 열고 ‘지인’ 수녀님이 들어오셨다. 안나의 손에 들린 떡을 보고 지인 수녀님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졌다.


“?”


지인 수녀님은 토요교리 시간에 수녀님들 중 가장 무섭다. 표정은 항상 근엄해서 먹구름처럼 어둡고 목소리는 가늘고 눈도 가늘었다. 교리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산만한 남학생을 야단칠 때 수녀님의 높아진 목소리에서 깨진 접시 소리가 났다. 안나는 당황 하며 수녀님이 묻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마리가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교단 위 은쟁반에서 가져왔어요”


수녀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마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에서 나오려던 목소리가 무섭게 노려보는 지인 수녀님의 표정에 짓눌려 다시 목을 타고 들어가 마음속에서 빙빙 돌았다. 마리는 울상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를 보더니, 평소라면 야단을 치셨을 지인 수녀님께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마리와 안나는 사제님께 가서 보속을 받도록 하거라”


사제님은 대 신부님을 보좌하시는 분으로 작은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마리와 안나는 수녀원 뜰에서 작은 신부님을 기다렸다. 마리는 안 나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안나를 피해 수녀원 한쪽 모퉁이 돌담 아래에 숨었다. 곧 작은 신부님이 오셨고 마리가 먼저 보속을 받았다. ‘보속’은 자신이 잘못한 일을 사실대로 고백하면 신부님께서 작은 종이에 처방을 내려주신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음 토요교리 시간과 미사 시간까지 실천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 무슨 잘못을 했니? 떡을 몰래 먹었니?”


“저, 저는 떡을 먹지 않았어요. 몰래 떡을 가져오라고 안나에게 시키지도 않았어요”


마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수녀님께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니?”


“무, 무서워서요”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무서웠을까?”


마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엉엉 울음으로 대신했다. 신부님이 보속의 내용을 적은 종이를 건넸다.


‘친구를 미워하지 말 것’


“저는 안나를 미워한 적이 없어요.” 마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주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


작은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안나도 보속을 받았다.


‘주님의 몸인 떡을 몰래 먹었어요. 거짓말을 했어요. 주여,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보속을 먼저 받은 마리가 밖에서 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에 안나가 보속을 받고 성당문 밖으로 나왔다. 마리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고자질쟁이”


안나가 한마디를 던지고 마리 곁을 휙 지나치며 빠르게 달렸다. 마리는 당황스러워서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그 후 마리는 한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1화우리의 삶은 서사가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