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의 삶은 서사가 있다 3

by 로즈릴리

여섯 명의 수강생이 모여 언어학 토론이 이어졌다.



(안나) “언어는 수행 동사 없이 행위를 유발하게 됩니다. 문화적 혹은 관습적으로 우리나라는 특히 ‘화용’이 발달한 나라죠”


안나는 갑자기 정지희에게 물었다.


(안나) “좀 춥지 않아요? 안 추워요?”


(정지희) “네, 괜찮습니다” 안나의 물음에 정지희가 대답했다.


그때, 이승후가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보일러 작동기 쪽으로 갔다.


(이승후) “온도 올릴까요?”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 “방금 ‘온도 좀 올려 주세요’라는 수행 동사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죠. ‘춥지 않아요?’라는 암시 표현으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을 ‘화행’이라 하죠”


안나는 눈이 반달이 되어 웃으며 말했다.


(이승후) “그러니까, 여성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의 겉옷을 자연스럽게 얻어 입고 싶을 때,

‘너 잠바 좀 벗어서 나한테 줄래?’ 직접 요청을 하지 않고도 ‘춥지 않니?’라는 암시 표현으로

행위를 유발하는 것과 어떤 의도를 갖고 말하는지 알아차리는 대화법이 ‘화용’이군요.”



안나와 이승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원어민 디토가 나섰다.


(디토) “대한민국은 ‘화용’이 발달한 나라죠. 말을 빙빙 돌려하다 보니 서양처럼 직접 요구하는 ‘직접화법’에 익숙한 외국인들이 한국에 살면서 대화 분석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한류열풍으로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원어민 유학생 ‘디토’가 말했다.


(이승후)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그래요. 하하하^^ 의사소통을 할 때 어떤 행위를 기대하면서도 직설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피합니다. 화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는 동시에 상대방이 그 의도를 알아차릴 것을 원하죠”


이승후의 목소리는 크고 자신감이 묻어났다.


안나는 잠깐이었지만 이승후에게 강렬하게 빠져들었다. 이승후가 말할 때마다 안나는 눈과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안나는 뭔가 강렬한 것에 쉽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였다.


마리와 안나가 같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중학교 3학년 봄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안나는 마리에게 성당의 작은 사제님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좋아하는 대상이 작은 사제님에서 마리의 오빠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안나가 마리의 집에 놀러 왔을 때 안나는 전혀 수줍음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고등학교 2학년인 마리의 오빠에게 요구했다.


(안나) "제가 꼭 봐야 할 것이 오빠 방에 있어요."


마치 빚쟁이가 빚을 받으러 온 듯 당당했다. 그리고 마리 오빠의 방을 여러 번 오기라도 한 듯 "왜?" 냐고 묻기도 따지기도 전에 번개처럼 방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리고 마리 오빠의 책상 위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보고 중얼거렸다.


“오빠, 이 그림 저에게 주면 안 돼요? 이 그림이 자꾸 아른거리는데 밤마다 꿈에까지 나타나서 괴로워요.”


안나는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를 못에서 떼어 내어 바닥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그림은 시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그림대회에서 최우수상 입상한 그림이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림이었다.


마리 오빠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미술학원이라곤 단 두 달 다니고 말았지만, 그림대회에서 보석처럼 쏟아질 듯한 푸른 밤하늘에 검은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나무를 그려 입상했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진지하게 미대 입시를 고려해 보라고 말했다. 마리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낙서처럼 쓱쓱 그림을 그렸다. 미술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장남은 미술을 전공하기보다 나랏일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기대와 사주에 관(官)이 들어있다고 누누이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기대로 미술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와 상관없이 법대에 입학하였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던 안나는 사춘기 여학생답게 자신이 등 뒤에 스스로 지은 달팽이 껍데기 속에 파묻혀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듯 보였다. 안나가 돌아간 뒤, 오빠는 마리를 불러 안 나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안나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너무 쉽게 하는 위험한 존재라고 기꺼이 주장했다.


마리와 안나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안나의 행동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하려고 하면 할수록 안나는 더욱 위험한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헛된 믿음인가를 오빠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근거 없는 믿음은 바라는 자의 허상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성당의 교리 시간과 미사 시간에 매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작은 허물 정도는 당연히 이해하고 품어줘야 마땅하리라 여겼다. 마리가 여섯 살 때 성당에서 받았던 보속의 내용도 같지 않았는가.


그러나 오빠는 안나를 싫어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두려웠다. 오빠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안나가 가진 방자하고 당돌한 태도와 안나가 거침없이 발휘하는 온갖 열광을 선망하면서도 안나를 거부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2화우리의 삶은 서사가 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