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후) “지희양, 난 지희양을 회사 동료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승후는 물 한모금을 마시고 나서 이어 말했다.
(이승후) “그리고 가서 아버지께 전해요. 회사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거라구요.
그분은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하고 사랑을 가르쳐 준 분이야.
지금껏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내가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남을 위해 아파하는 날이 올 줄 몰랐어. 이런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정지희) “ 그 대상이 노안나인가요? 아니면 홍마리인가요?”
(이승후) “ 둘 다 아니니까, 더 이상 선 넘지 말고 그만 가줘요.”
(정지희) “저는 지난 3년간 팀장님 곁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어요. 물론 회사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팀장님을 제가 인간적으로 또 이성의 대상으로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어요.”
(이승후)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지금도 사장님이 시켜서 왔다고는 하지만, 당신은 그저 나의 앞을 막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여요.”
(정지희) “노안나인가요? 홍마리인가요? 그 대상 정도는 알아야겠어요.”
(이승후) “더는 무례하게 굴지 말고 당장 눈 앞에서 사라져요. 여기까지 따라 온 것도 참을 수 없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의 사생활을 캐는거냐고"
순간 이승후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 정지희에게 소리쳤다.
"당장 꺼져 버려”
이승후는 주체할 수 없이 분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마리는 2주마다 가지는 인문학 프로젝트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한 번은 비가 와서 오전에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때문에 비를 피해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2층으로 지어진 아담하고 아늑한 카페였는데 그곳에서 이승후를 만났다.
(이승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바른 행동, 바른 생각보다는 색다른 기발하고 독특한 생각을 ‘창의력’이라는 이름으로 더 바람직하게 여기며 칭찬하는 시대죠.”
(마리) “그럼에도, 인간은 분명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을 구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이성의 소유자이며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고전이나 진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승후)“반드시 옳은 것, 반드시 바른 것이 있나요? 있다면 ‘바르다’의 기준은 누가 정하고 제시한 것이죠?”
(마리) “삶은 근본적으로 역설적이면서 현실적이고, 우리의 삶은 논리가 지배하기도 하지만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요.”
(이승후)“자신의 생명을 살려주고 키워주었던 물과 공기가 나중에 오염되거나 고갈되어 질식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면, 반드시 옳은 것과 반드시 바른 것을 힘들게 찾아 선택할 필요 없이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준다면, 최소한의 순간이라도 그것은 적합하고 합리적인 옳고 바름이 될 것입니다.”
이승후의 언변은 푸른 불꽃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마리는 유감스럽게도 이승후가 구사하는 세련된 언변과 역설적인 지식에 두통이 날 정도로 어지러웠다.
(마리) “그러나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어요. 잘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하여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수 있고 행동에 책임이 사라진다면, 그래서 기쁨과 감사할 일이 없다면 행복이라는 감정을 알 수 있을까요?”
(이승후) “세상 모든 것은 선택 가능성이 열려 있고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도 백화점의 물건을 고르듯 어느 것이나 선택할 수 있다고 봐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승후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옳다고 믿는 아이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리가 지켜본 이승후는 예의가 바르고 학업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늦깎이 청년이었다. 그는 마리와 함께 있는 동안 예의를 벗어나 행동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외국인 유학생 원어민 ‘디토’가 잘 모르는 부분을 물어 올 때도 이승후는 자상하고 섬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디토’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감정을 담아 이승후에게 고마움을 표현했고 “감사합니다”,“사랑해요”를 연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