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어느 벤치에서..
한참을 걷고 나서야 가까운 벤치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봄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바로 옆에 피어 있는 꽃, 등을 살짝 데우는 햇살, 그리고 그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호숫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따뜻한 바람이 살결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바람 덕분에, 고요한 공원에선 누군가 책을 읽으며 넘기는 종이 한 장 한 장의 소리조차 또렷하게 들려온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잔잔하다.
겉옷을 벗고 반팔 차림으로 앉아 있으니,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저 멀리서 보이는 아줌마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걷고 있다. 반대로, 노란색 반팔을 입은 또 다른 아줌마는 날씨가 더웠는지 점퍼를 손에 들고 걸어간다. 양쪽 끝에서 출발한 서로 다른 계절감의 두 사람이 공원길에서 잠시 마주친다.
그 뒤를 이어, 오늘 하루 연차를 내고 공원을 찾은 듯한 중년 남성이 슬리퍼를 끌며 걸어간다. 그는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올려놓고 음악을 듣고 있다. 음악 소리가 공원의 고요함을 잠시 흔들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걷는다. 어디선가 갓난아기를 태운 요람을 밀며 산책 중인 신혼부부도 눈에 들어온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그들은, 아기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며 바람을 맞고 있다.
공원은 점점 더 다양한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초등학교 정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여자아이, 유치원 픽업 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인 젊은 엄마들, 그리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자매들. 모두 이 따뜻한 봄날의 한 조각을 살고 있다.
위를 올려다보면, 5분마다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지른다. 지금 그 비행기엔 인도네시아 우붓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새로운 풍경 속에서 잠시 ‘비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 둘이 나란히 미술 학원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수학을, 또 누군가는 영어, 코딩 수업을 위해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엄마는 호숫가를 걷고, 남편은 이른 퇴근 중이거나, 아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겠지. 장난감처럼 생긴 작은 전기차를 몰며 공원을 정비하는 공원 아저씨는 자신의 일에 묵묵히 집중하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삶을 지나간다. 그런데 문득, 내 시야에 들어온 한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벤치에 앉는다. 남편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아내는 고개를 떨군 채 듣고 있다. 서로를 위로하려 애쓰는 모습. 산뜻한 봄날 풍경 속에서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심각하다.
그들의 옆을 헬스 경력 1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민소매 차림의 아저씨가 지나간다. 아내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걷는 그의 모습이 묘하게 평온하다. 그 순간, 공원의 고요를 깨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른 가지와 낙엽을 청소하느라 커다란 기계음을 내는 공원 아저씨의 청소기. 갑작스러운 소음에 순간 놀라지만, 이 또한 일상의 일부다. 공원의 정적은 다시금 사람의 움직임과 소리로 채워진다.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 작은 생명체 하나가 보여주는 용기. 마치 절대 떨어질 일이 없다는 듯, 호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사이,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엄마와 친여동생,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음식점 사장님, 검은 운동복 차림으로 파워워킹을 하는 아주머니, 장바구니가 걸린 자전거를 타고 마트로 향하는 또 다른 아주머니까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번엔 태국행 비행기가 지나간다. 이 호수공원의 평화로움과는 상관없이, 누군가는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있고, 누군가는 그들을 배웅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삶은 각자의 출발지와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움직인다.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친다. “모두들 살아지는 걸까? 아니면 살아내고 있는 걸까?” 혹은 그냥 ‘지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깊은 생각들 속에서도 봄바람은 내 몸을 신나게 때리며,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이 어떤 모양이든, 자연은 그저 주어진 몫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바람도, 햇살도, 꽃도.
조금 전까지 심각했던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간다. 여전히 무거운 표정이지만, 남편은 아내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준다. 그들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서로 곁에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여정 같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헤어지고,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인간의 삶을 신은 어디까지 관여하고 계실까.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그분은, 우리가 그 선물을 잘 쓰고 있는지 지켜보고 계실까? 아니면 우리가 그것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평범한 호수 공원에서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며, 나의 평범한 일상을 정당화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렇다. 생각이 많아진 하루.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고민의 시간이 평범한 일상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용한 봄날 오후, 벤치에 앉아 바라본 풍경은 그렇게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