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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 너머의 목소리 -아내의 삶을 다시 듣다-

누군가의 목소리..

by 간달프 아저씨


노량진역 근처, 지인을 기다리다 시간이 남아 근처 롯데리아에 들렀다. 딱히 뭘 주문하지도 않은 채, 이어폰을 꽂고 멜론 플레이어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이어폰 너머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한 젊은 여성분이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목소리에는 울컥하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무심히 들으려던 음악은 금세 배경이 되고, 난 어느새 그 통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고모, 형제들이 여섯이니까 다 의견 물어보고 할머니 어떻게 할지 상의해 봐요…”

“아빠는 병원 말고 그냥 집에 계시다가 장례식장으로 보내드리는 게 좋겠대요…”


그녀는 할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추측이 맞다면, 그녀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서 자란 손녀였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연로하신 할머니의 거취를 고모에게 설득하듯 말하고 있었다. 자식도 아닌 손녀가 왜 이 모든 감정을 짊어지고 있을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는 걸.


그건 바로, 내 아내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내 역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돌봄의 주체가 부모만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엄마처럼 밥을 지어주고, 때로는 아빠처럼 곁을 지켜주셨다. 그리고 아내는,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그 사랑을 잊지 못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곁을 지키며 울고 또 울었다.


어느 날은 자다 말고 울고 있는 아내를 봤다. 할머니의 영상을 틀어놓고 소리 없이 흐느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나는 우리 아이에게 조부모의 사랑을 너무 깊게 받게 하진 않을 거야.

부모를 두 번 잃는 기분이니까…”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오늘, 내가 들은 그 목소리 속 손녀의 이야기에서 아내를 다시 보게 되었다.요즘은 귀를 닫고 사는 시대다. 다들 말하는 건 좋아하면서, 듣는 건 피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사연이 누군가에겐 전부일 수 있는데 말이다.


가끔은 주변을 둘러보자. 내 옆 사람, 내 가족, 내 친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내 아내의 여린 마음을 다시 한번 꺼내 보았다.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만큼 행복을 받아야 할 사람 —

그게 내 아내였다.


우리에겐 들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마음이, 작은 말 한 마디가 상대에게는 큰 나무 한 그루의 그늘처럼 다가가게 할 수 있으니까. 핸드폰을 잠시 내려두고, 고개를 들고 내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연습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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