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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Apr 28. 2023

멋진 신세계

2020년 11월 14일  

미국에 온 지 471일째 되는 날 _ (불체 중)






"집에 안전하게 들어갔기를 바랍니다. 먼 길 와주어서 감사합니다. 찢어진 손가락 피부는 상처 소독을 꼭 다시 하고 며칠 동안 반창고를 잘 붙이고 따뜻한 물에 근육을 풀어주세요. 기회가 된다면 그대가 사는 곳과 가까운 다른 센터에서 만나 운동을 다시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첫 만남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 일 코치"로부터 이렇게 문자가 왔다. 물론 영어로 썼으므로 존댓말인지 반말인지는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똑똑한 사람이 자상하기까지 하니 참으로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아이비리그의 천재들 - 냉철하고 사회성이 약간 떨어지며 어딘가 비범한 냄새를 풍기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사람냄새를 사뭇 풍기는 선하고 따뜻한 청년이었다. 역시 기존의 편견을 깨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 내게 더 필요하다.



한 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암벽등반 코칭이 지난 한 달 내내 그의 배려로 주말마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센터에서 지속되었다. 스파이더맨처럼 손만 갖다 대면 아무 벽에나 찰싹찰싹 달라붙었으면 좋으련만 암벽등반 운동은 그렇게 쉬운 운동이 아니었다. 악력과 팔근육, 등근육, 코어근육, 유연성, 기본 신체조건, 루트를 외우고 창조해 나가는 두뇌, 안 되겠다 싶을 때는 매트리스 위로 뛰어내리는 과감함, 집중력 그 모든 것들을 두루 갖추어야 부상 없이 깔끔한 등반이 완성된다.



내 손가락은 동전박스들을 나르면서 운동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곳저곳에 피부가 찢어지고 굳은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 아무렴! 그래도 좋다. 미국에 온 뒤로 일 년 넘게 온종일 입을 꾹 닫고 살다가 최근 들어 다시 수다쟁이가 되었으니, 손가락의 상처는 같이 운동하는 친구가 생겼다는 증표 같은 것이다.



오늘은 퀸스에 있는 롱아일랜드 시티에서 만나 등반을 같이하고 끝나면 근처 맥주 양조장에 가기로 했다. 암벽등반 센터에서 나온 뒤 롱아일랜드 시티 이곳저곳을 같이 둘러보며 양조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곳 롱아일랜드 시티는 참으로 눈부신 보물 같은 곳이다. 뉴욕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가 있다면 맨해튼에서만 머물지 말고 이곳에 꼭 한번 들러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맨해튼 안에서만 돌아다닐 때는 빌딩숲에 둘러싸여 볼 수 없던 시내전경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롱아일랜드 시티에 오면 한눈에 다 담긴다. 마치 살아내는 순간에는 느끼지 못해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반짝임이 느껴지는 우리의 찬란한 인생들처럼.


9월 11일 롱아일랜드 시티에서 본 맨해튼 전경. 매년 이 날 하루는 쌍둥이 세계무역 빌딩 희생자들을 기리며 건물이 있던 그 자리로부터 두 줄기의 강한 빛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린다


롱아일랜드 시티에는 맨해튼과는 다르게 신축 아파트들이 수두룩하다.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오고 가는 젊은 커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다른 기반 시설들도 매우 잘 구비되어 있으니 렌트비는 굳이 검색해 보지 않아도 어마어마할 것으로 예상된다.



눈부신 이 멋진 신세계에는 어떤 직업을 갖고 얼마를 벌어야지 거주할 수 있는 것일까. 저들은 어디에서 온 어떤 사람들일까. 내 인생에도 이런 곳에서 살 날이 올까.



양조장에서 맥주를 많이 마셨는지 실없는 질문을 줄줄이 해대는 나에게 이 친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너도 여기 살면 되지"라고, 말로 하기에는 아주 쉬운 대답을 해준다.



"돈이 얼만데, 내가 어떻게 여기에 살아?"



"같이 살면 되지"



"응??????"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낫 베드야 낫 베드(Not bad)."



그런 일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농담으로 치부해 버리고 웃어넘겼다.

그도 나를 따라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 대화를 나누었던 양조장 근처의 벤치_ 특별출연: 친구의 밴드를 붙인 손

Hunter's Point South Park,  Center Blvd, Long Island City, NY 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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