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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Apr 29. 2023

서러움? 극복!

2020년 12월 03일

미국에 온 지 490일째 되는 날 _ (불체 중)






다 좋은데 해외살이를 해오면서 가장 서운한 감정이 들 때를 꼽는다면 명절 때나 생일 때이다. 가족들과 같이 살지 않는 타향살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추석이나 음력설 같은 모국의 큰 명절일 때면 나도 가족들과 같이 모여 앉아 오손도손 보내고 싶은데 현지에서는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보통날인 것이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명절이라고 음식을 평소보다 더 차려놔도 결국 혼자서 먹고 치우는데만 더 힘이 든다.  



현지의 명절도 서운한 것은 마찬가지다. 독립 기념일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현지의 큰 명절이 돌아오면 나는 정작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기에 가슴깊이 그 명절 분위기를 만끽하지는 못한다. 그저 "아, 다들 휴가철이구나. 차가 많이 막히겠구나"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한 날로 기억될 뿐이다. 



생일 때는 더욱 서운하다.

내입으로 "제가 오늘 생일인데요!"라고 떠벌리고 다녀야지 몇 사람한테서 "생일 축하해"라는 말을 들을까 말까 한다. 제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그렇게 까지 해가며 낯 간지러운 생일축하를 받고 싶지는 않고 생일날이면 그저 이 특별한 날이 빨리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보통날이었다면 그토록 서운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작년 오늘은 미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이었는데 참으로 우중충한 하루를 보냈다. 스스로를 그래도 아껴준답시고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플러싱 바닥을 삼십 분 동안 헤집고 돌아다녔는데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느라 비싸 보이는 곳에는 얼씬도 못했다. 결국 설렁탕집에서 도가니탕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그것도 30~40불은 생일날 나에게 쓸 수 있지 않나 생각하며 큰 마음을 먹고 들어간 것인데 다 먹고 보니 15불밖에 되지 않아 팁으로 15불을 얹어 주고 나와버렸다. 내 생에 음식값의 100%를 팁으로 준 식사는 아마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생일날 적어도 30불은 쓰고 싶었던 참말로 짠한 하루였다.



최근에 암벽등반을 같이 하는 친구가 한 명 생기기는 했지만 올해의 생일날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직 생일날을 공개한 적이 없으니 그도 생일인 줄 모르고 있을 것이 때문에.



아침에 일어났는데 새벽 열두 시 정각에 문자가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생일축하해! 다음 세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오늘 점심까지 알려줘. 혹시 오늘 이루어질지도 모르잖아?

1) 맨해튼 헬기투어를 한다.  

2) 뉴욕에서 제일 유명한 루프탑바에 간다.  

3) 뉴저지에서 제일 럭셔리한 스파에 간다.]



이 친구를 만나고 요새 자주 쓰는 말이 생겼다.

"이게 웬 떡이냐?"

애주가인 나는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2번을 골랐지만 오랫동안 고민하고 선택지를 만들었을 친구를 생각하여 합리적인 고민을 하는 척 성의를 보이며 답장을 보냈다.



[음... 헬기는 지금 12 월이라 너무 추울 것 같고,  3 번은 팬데믹 기간에 수영장에 가는 게 조금 꺼려지네. 2번이 가장 무난할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이루어 질까? 설마 나에게? ]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는지 암벽등반 회원권을 만들 때 나의 생일을 기재했던 적이 있는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이제 나에게도 말을 하지 않아도 생일을 챙겨주는 친구가 해외에서 생겼다는 사실에 뛸 듯 기뻤다! 이런 감정은 숨기는 것이 아니다.



당장 전화를 걸어 나는 지금 너무 기쁘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내 생일날 나를 기쁘게 해 주겠다고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 너의 축하를 받은 지금이, 이따가 방문하게 될 유명하다는 루프탑 바가, 드레스코드는 어떻게 되고 나에게 입고 갈 만한 옷이 있는지를 떠올리는 이 행복한 고민이, 이 모든 것이 나를 설레게 한다고 당장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너무 혼자 들떠있는 것이 아닌지, 어영부영하며 이 모든 감사의 말들을 바보같이 삼켜 버리고 혼자서 일기에다가 만 소심하게 적어뒀다.



정말 바보같이.



나답지 못했다.



the Press Lounge_653 11th Ave 16th Floor, New York, NY 10036_팬데믹 기간이라 역대급으로 한적한 루프탑 바에서 바라본 뉴욕시의 전경


그렇게.

미국에서 맞는 나의 두 번째 생일은 화려했고 행복했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

나의 서러움은 극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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