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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 빛 Apr 26. 2023

뜻밖의 귀한 만남

2020년 10월 18일

미국에 온 지 444일째 되는 날 _ (불체 중)






매일 혼자 거리에서 조깅을 하고 무거운 쇠덩어리를 들다가 이제는 새로운 운동도 좀 배워보고 사람도 만나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최근에 와서 갑자기 들었다. 가을을 타는 것인가.



새로운 운동 중에서도 한국에 있을 때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 배워두지 못했던 암벽등반을 가장 시도해 보고 싶었다. 지금 보험을 들 수 없는 상태이기에 무작정 혼자 벽을 타다가 벽에서 떨어져 다치면 병원비 감당이 안 될 것 같고 (만약 떨어지더라도 911- 구급차를 불러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기본적인 배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틀 전 난생처음 페이스북 공고란에 암벽등반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연락 좀 달라고 글을 올렸다. 어제 Meet up이라는 동호회 비슷한 그룹 모임 앱에다가도 글을 올리고, 크게 희망을 가지지는 않지만 Hinge라는 데이팅앱 한 군데에도 "암벽등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겸허한 자세로 글을 올렸다. 이틀을 기다렸는데 데이팅앱 한 군데 빼고는 연락 오는 데가 없었다. 이미 유행이 지나버린 운동인 것일까?



더 자세히 말하자면 Hinge라는 데이팅 앱에서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메시지가 왔다: "코로나 록다운 기간 동안 암벽등반 센터가 문을 닫아서 채 쓰지 못한 회원권이 있는데, 일주일 전에 센터가 문을 열었고 무료로 게스트 한 명을 초대할 수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오."



이게 웬 떡인가? 나는 당장 주말에 시간이 비니 이번 주말 그 무료 게스트 권을 좀 사용할 수 있겠냐고 답장을 보냈고 그것이 곧바로 오늘의 만남으로 이어진 것이다.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이 시국에도 사람을 만날 수는 있구나 새삼 느꼈다.



암벽등반 센터는 생각보다 내가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만나기로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별 수 있는가. 두 시간 조금 넘게 지하철을 갈아타고 점심 열두 시 약속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해 암벽등반 센터 앞에서 기다렸다. 데이팅 앱으로 알게 된 사람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얼굴 사진을 올려두지 않아 얼굴도 인종도 목소리도 나이도 모르고 이름만 아는 상태이니 길에서 오고 가는 행인들로부터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상대는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 그저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약속시간으로부터 2 분이 경과되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영어이름을 부르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 이렇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고? 하고 1초 정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늘씬 탄탄한 몸매를 가까이에서 보고는 아. 이 사람이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이겠구나 확신이 갔다.



만나자마자 통성명만 하고 곧바로 커피를 사들고 기초 훈련을 시작한다면서 영화 "기생충"에나 나올법한 악마의 계단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계단을 반복해서 올리 뛰고 내리뛰고 땀에 옷이 젖을 무렵 암벽등반을 이제 시작한다면서 센터 앞까지 또 뛰어서 도착했다.


굽이 굽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또 다른 계단이 나온다. 69 St Clair Pl, New York, NY 10027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체력으로는 그 누구한테 쉽게 뒤쳐지는 편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정말로 운동만 하려고 나온 사람이구나 믿음이 갔고 데이팅 앱으로부터 이루어진 이 당황스러울 만치 건전한 만남에 웃음이 났다.



꽤나 자상하게, 그러나 엄격하게 암벽 틈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법부터, 튀어나온 돌을 잡는 법, 높은 곳으로부터의 낙법, 엄지발가락 끝을 사용해 벽에 매달려 있는 법, 벽 위에서 다리를 교차하면서 발을 옮겨 딛는 법... 이 정도의 코칭을 기대한 것까지는 아닌데 너무도 자세하게, 하나라도 더 전수해 주려고 첫날부터 애를 쓰는 인내심 가득한 그의 모습에 감탄을 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나는 무료 회원권이 있다길래 그저 오늘 하루 암벽등반이 어떤 것인지 맛보기나 할 겸 일단 나온 것인데 첫날부터 이런 훌륭한 무료 코칭을 받고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끝난 뒤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도 열정 가득한 이 왕초보자에 감동을 한 것인지, 어제 문자로는 저녁에 할 일이 있다더니 밥 먹자는 나의 제안에 쉽게 그러자고 응했다.



운동할 때는 사뭇 진지했지만 밥 먹으러 나오니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각기 도수가 약한 미모사 칵테일과 오늘 한 운동이 헛되지 않게 풀내음이 폴폴 풍기는 건강식을 시켜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사실 풀만 가득한 이런 식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Community Food & Juice__2893 Broadway, New York, NY 10025

오는데 얼마나 걸리더냐고 물어봐서 두 시간 좀 더 걸렸다고 하니 기겁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오는데 3분이 걸렸다면서 너에게 너무 불공평한 것 같으니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참 선해 보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내가 이것저것 물으니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을 성실히 잘해주었다(묻지 않은 이야기들까지도 스스럼없이 해주었다).



부모님은 엘살바도르에서 온 이민자 분들인데 본인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고 졸업을 하고 회사를 창업한 지 두 달째 접어든다는 이야기, 아프가니스탄 공군으로 사 년간 중동에 거주했던 이야기(어쩐지 보통 체력은 아니다 했다), 아이비리그를 조기졸업한 이야기(어쩐지 천재끼가 좀 보인다 했다), 본인 누나 이야기... 첫 만남에 그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세도 아니고 자랑도 아니고 그저 같은 이야기라도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 사람임이 느껴져 별 볼일 없는 내 삶도 스스럼없이 공개할 수 있었다.



신입사원시절 나도 한때 엘살바도르 무역을 담당하고 있어 짧은 스페인어도 할 수 있다고 선보였고 내가 처음으로 담당하던 중남미 국가의 일원을 만나게 된 것이 정말 반갑다고 국가 이야기도 하고 아쉬운 대로 칵테일 한 잔만 더 마시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나의 다락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 이렇게 건전한 만남이 또 있을까?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는데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치유를 얻었다. 이런 친구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니, 많이도 말고 한 명이라도 좋으니 이 사람과 앞으로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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