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는 얼마에 나가요? 월세는요? 집값이 오를 것 같아요?
대출은 얼마나 받을 수 있어요?"
전화를 통해 걸걸한 목소리로 계속 질문을 던지는 아가씨는 내 대답은 듣지 않는 것 같다.
내 딴엔 열심히 설명한다고 했는데, 전달이 잘 되었나 모르겠다.
조만간 사무실에 한 번 들르겠다며 전활 끊는다.
사무실에 온 아가씨는, 걸쭉한 말투와 목소리와 다르게
TV에서나 볼 법한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다.
"월세가 2천에 75만 원에 나간다구요? 그럼 월세로 내줘요."
아... 필요한 말은 다 듣고 있었구나.
다른 부동산엔 중개의뢰를 하지 않을 테니 잘 부탁한다며 떠나는 아가씨.
오! 맘에 들어.
의리 있을 것 같아...
전월세가 귀한 시절이라 금방 임차인을 구할 수 있었다.
월세도 5만 원 깎아준다는 아가씨.
성격이 너무 시원시원하다.
알고 싶은 사람이다.
가계약금이 들어가고, 돌아오는 주말에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임차인은 조금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고,
계약서와 확인설명서까지 다 작성해 두었는데
약속시간이 한참을 지나도록 임대인, 그 아가씨는 오질 않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벌써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렵게 임차인에게 말했다.
"고객님. 오늘은 계약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연락을 시도해 보고, 연결이 안 되면 가계약금은 일단 제가 환불해 드릴 테니
하루만 기다려 주세요"
그날 하루, 여러 차례 전화를 해도 그 아가씨는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자비로 임차인에게
가계약금을 돌려주고 계약은 보류되었다.
다음날 오후.
행여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드디어 전화를 받는다.
"아니, 고객님. 왜 전활 안 받으셨어요.?"
짜증 섞인 나의 물음에 돌아오는 답변이 이상하다.
"누구세요?"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
"어?... 어? 상미 씨 전화 아닌가요?"
"전화기 주인은 그저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전 남편이고요"
"아... 아... 그랬군요."
그리고 전남편이라는 분은 나에게 문자로 그녀의 부고소식을 전해주었다.
모 병원 장례식장, 몇 호실... 향연 32세.
부고문자에 깨알처럼 적힌 그녀의 두 아이의 이름이 너무 아프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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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혹은 친한 사람까지 갈 것도 없다.
이름만 아는 사람. 얼굴 본 적이 있는 사람.
단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의 비보에도 마음은 서늘해진다.
세상이 허무하다.
'아. 맞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
단 0.0000000001프로의 오차도 없이 100% 모두 죽지.
나도 죽는 거지. 당장 내일 뜬금없이 죽는다고 해도 미스터리는 아닌 거지.'
오랜만에, 잊고 살던 당연하고 당연한 진리가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죽음을 생각하면,
사람은 좀 더 담담할 수 있을까.
덜 두렵고, 덜 슬프고 덜 분노하게 될까.
누구에게나 당연한 죽음을 생각하면
사람은 좀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더 나누고, 더 웃고, 더 용서하게 될까.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화.
종착역에 도착해서 보았던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었는데.
삶은 유한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결말.
(어린아이가 보기엔 그저 충격적인 결말)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결말.
하지만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삶은 선물이라는 것을,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산다.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늘은 조금 더 많이 웃으려 노력해 봐야겠다.
조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보자.
짧은 만남. 짧은 대화였지만, 참으로 매력적이었던 그녀.
평안이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