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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Jun 02. 2024

'작 별 하 지  않 는 다' 한강(고등학생 권장도서)

1부 새

 1 결정 結晶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그녀들의 아이들과 손을 나눠 잡고 서로 도우며 우물 안쪽 벽을 타고 내려갔다. 아래쪽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수십 발의 총탄이 우물 입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힘껏 안아 품속에 숨겼다. 바싹 마른 줄 알았던 우물 바닥에서 고무를 녹인 듯 끈끈한 풀물이 차올랐다. 우리들의 피와 비명을 삼키기 위해.


                                                                            2 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입고, 증기 같은 열풍이 더이상 불어오지 않는 도로변을 걸어 나는 식당을 간다. 여전히 요리를 할 수 없다. 한끼 이상의 식사를 할 수도 없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었던 기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밤 인선이 나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었을 때 검은 나무들의 꿈 이야기를 꺼낸 건 그렇게 복잡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름에 꾸었던 꿈이 겨울이 가까워오도록 자꾸 생각난다고.


 그러니 같이 무언가를 해보면 어떻겠는지 나는 인선에게 물었다. 함께 통나무들을 심어 먹을 입히고, 눈이 내리길 기다려 그걸 영상으로 담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인선이 말을 멈췄다. 간병인이 인선의 상처에 서슴없이 바늘을 찔러넣는 동작을 나는 똑똑히 다시 보았고, 인선과 함께 숨을 멈춘 채 후회했다.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총에 맞고,

 몽두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


 그때 알았다. 인선이 줄곧 나를 생각해왔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약속했던 프로젝트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 년 전 내가 꾼 꿈속의 검은 나무들을. 그 꿈의 근원이었던 그 책을.


                                                                    3 폭설

 제주 집에 가줘, 라고 인선이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곳까지 왔다.


 아마는 아미와 달리 머리부터 꼬리 깃털까지 완전히 희어서 더 수수해 보였고, 말을 못하는 대신 인선의 허밍을 유려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


 네가 가주면 좋겠어. 경하야. 그 집에서 아미를 돌봐줘. 내가 퇴원할 때까지만.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그렇게 인선의 고향은 그녀가 가르쳐주는 담당한 방언-어미들이 홀홀히 짧은-과, 사람이 그리워 농구 경기를 즐겨 본다는 아이 같은 할머니의 이미로만 남아 있었다. 내가 잡지 일을 막 그만두었던 연말, 일을 사이에 두지 않은 순수한 친구로서는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저녁까지는.


 그 요 아래 실톱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날카로운 쇠붙이를 깔고 자야 악몽을 안 꾼다는 미신을 엄마는 믿었거든. 하지만 실톱을 깔고도 엄마는 자주 꿈을 꿨어. 숨을 죽여 목서리를 치고, 이따금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흐느껴 울었어. 그 모습, 그 소리가 나한테 지옥이었어. 후회하지 않을 거락고, 다신 안 돌아올 거라고 그때 스스로에게 맹세했어.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더이상 어둡게 채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으로.


 내가 다친 걸 진작 알았다고 그때 엄만 말했어. 병원에서 연락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 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


                                                                                           *


 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와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다만 이상한 건, 엄마가 내 가출에 대해 그때에도, 그후에도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는 거야. 내 행동을 탓하지 않았고, 이유조차 묻지 않았어. 수십 년 전 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 어린 자매가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내 장사를 치른 과정에 대해서도, 그후 어떤 끈기와 행운으로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4 새

 기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폭우로 퍼부었을 밀도의 눈이다. 십여 년 전 인선이 베트남 내륙의 밀림에서 촬영했던, 자비 없이 열대의 나무들을 부러뜨리던 비처럼.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 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내 왼손 집게손가락을 횃대 삼아 앉아 있던 아미의 가슴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사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닿아보았던 어떤 생명체도 그들만큼 가볍지 않았다.


                                                                     5 남은 빛

 눈 속이 더 포근했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어요. 구덩이를 눈속에 파고 그 안 에서 아침을 기다렸다고 했어요. 잠이 들면 얼어 죽을 거라서 몸을 꼬집으며 버텼다고.


 혼자 산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만하면 불꽃 같은 게 활활 가슴에 일어서 얼어죽지 않은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그때 젖은 신발이 끝까지 마르지 않아 발가락 네 개가 떨어져나갔는데,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더래요.


                                                                         6 나무

 조금씩 다른 농도로 칠해진 그 검은 나무들이 어떤 말을하는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다시 솟아 상처에 엉긴다. 이해할 수 없다. 아미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


 새들이 건강해 보이는 건 믿을 수 없어, 경하야.

 끝까지 고개를 들고 횃대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 이미 죽은 거야.


                                                                                                                                                <2부 다음 주>


#한강소설

#작별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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