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하는 인간

<회복하는 인간> 한 강

by 이영희

죽은 자는 산자의 기억 안에서 계속 살아있다. 산자가 죽어야만 비로소 죽은 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작가 한 강의 <회복하는 인간>은 현재 시점에서 가까운 과거로 그리고 다시 현재로 건너온다. 그리곤 더 먼 기억을 끌어와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느 부분에서는 자칫 시간의 흐름을 헛짚을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언니의 명확한 병명은 소설 안에 나오지 않는다. 체중이 37kg까지 내려가면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다 죽은 언니. 화장하지 말고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대로 산에 묻힌다. 가족, 친지들과 내려오는 길에 ‘당신(동생)’은 호되게 발목을 접질린다.

한의원에서 침과 쑥뜸 치료를 받다 살이 타는 화상을 입게 된다. 라디오 대본 작가인 당신은 언니의 장례를 치르느라 방송국의 일이 밀려 있어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뜸자리에 물집이 생겨 터지고 세균 감염으로 상태가 심각해지고서야 병원에 간다. 의사는 감염된 죽은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치료하면 새 살이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지켜보자고 한다. 병원을 오가는 과정에 당신은 어린 날 언니와 함께여서 좋았던 추억과 불편했던 기억을 소환한다. 우애가 돈독했던 자매였다. 하지만 언니의 낙태 수술에 동행한 이후로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그때 언니는 졸업반이고 당신은 대학 1학년이었다.

중절 수술 후에 언니가 왜 당신을 멀리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몇 해가 지난다. 수년간 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지만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한순간 당신도 차갑게 언니에게서 돌아섰다.

그 후 언니는 결혼했지만 십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고가의 탕약과 불임시술에 시간을 쏟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던 언니는 큰 병을 앓는다. 친정식구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형부하고만 병원을 오간다,

점점 몸 상태가 심해지자 가족들이 알게 된다. 언니의 병원 생활을 엄마에게서 듣지만, 당신은 그녀를 방문하지 않는다. 언니도 당신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당신은 병실을 찾는다. 하지만 고통 속에 죽어가는 언니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녀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만다.

아주 더디게 화상 입은 발목에 새 살이 돋아 나온다는 말을 의사에게 듣지만, 당신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는 날까지 가슴에 품고 간 언니의 시린 감정과 지독한 통증으로 의식을 잃으며 죽어가던 언니의 고통엔 결코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더 오래 아파야 하고, 몸에 난 상처쯤이야 그깟 거, 또는 이따위, 라며 빨리 회복되길 원치 않는다.

언니가 어느 날 왜, 갑자기 냉담해졌는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언니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그때 당신은 언니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언니가 대학 졸업반인 12월 중순쯤 아이를 지우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고받은 말이다. 그 말을 다시 풀어내면, 동생은 언니에게 뱃속의 생명을 없애고 아무렇지 않게 견실한 사업체를 가진 잘생긴 다른 남자와 안정된 삶을 준비할 수 있냐며, 언니가 너무나 속물적이라는 의미를 담아 비난을 한 것이다. 동생의 말은 사무치게 꼬챙이같이 언니의 가슴에 박혔을 것이다. 서로 성격과 취향은 달라도 동생이 같은 여자로서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준다고 언니는 그날 저녁까지 믿었다, 하지만 늦은 밤 대화를 나눈 이후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것이다.

동생은 언니가 죽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말이었는지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동생은 자신이 언니보다 더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회복하는 인간>은 짧은 소설이다. 언니와 동생, 두 여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가 무심히 주고받는 말에서 상대방은 보이지 않게 깊이 상처받을 수 있다고, 이미 뱉어낸 말은 회복하기 어려우며 괴롭고 무거운 후회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반어법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회복하는 인간’은 ‘반성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생명을 가진 다른 동식물과는 달리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앎이 구체적이라 충격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그 불안을 하루하루 버텨낼 뿐이다.

한 강의 작품은 결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부재, 고독, 어둠, 꿈, 죽음이 늘 문장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책을 덮어도 여운이 쉬 가라앉지 않는다. 텍스트를 넘어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통찰.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 한 강. 그녀는 알고 있었다. 큰 상을 받고도 왜 사람들 앞에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하는지.

문학에 헌신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저자가 자취를 감춰서 작품이 홀로 서게 해야 한다는 것을…….

--계간현대수필 ,봄호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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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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